[선데이 칼럼] 이러다 검찰서 대선후보 지명할라

양선희 2021. 10. 30.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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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검찰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이리도 크고 깊은데 무슨 검찰 개혁 같은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금주 초 뉴스 정치면에 큼지막하게 올라온 한장의 사진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원희룡 전 제주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고발하는 고발장을 직접 들고 대검 포토라인에 선 사진 말이다. 고발한 혐의는 배임, 위증 등 무려 18건. 이 장면은 대선 주자가 직접 고발장을 들고 포토라인에 선 것이 색달라서 잠시 눈길을 끌었을 뿐이다. 사실 대선 후보와 주자들에 대한 고소·고발이야 이젠 너무 흔해서 그저 일상의 잡다한 대거리로 보일 정도다.

「 타협·대화 정신이라곤 없는 정치권
전문 시민단체, 대선 주자까지 나서
상대 후보 고발하러 검찰 찾는 나라
국민이 정신 차려 저질 정치 끝내야

그러다 문득 우리는 어쩌면 무감각해져선 안 될 것들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여름부터 대선 주자와 후보자를 둘러싼 고소·고발 건수를 세어 보았다. 그러나 세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주요 후보를 둘러싼 고발 건수가 10여 건이 훌쩍 넘어서는 걸 보고 이내 세는 걸 포기했다. 상당 부분이 언론에 의혹만 제기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전문 시민단체의 고발이었다. 이걸 소위 법조계 일각에선 ‘전문용어’로 ‘신문지 고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신문에 나는 의혹을 얼기설기 엮어서 고발부터 하고 본다는 의미란다.

한데 건수 집계를 포기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작업을 원시적으로 과거 기사 검색 방식으로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기사들도 다시 읽게 됐다. 그렇게 한 주제의 기사들을 과거부터 쭉 복기하다 보니, 더 읽다가는 내 영혼마저 지저분해질 것 같다는 지긋지긋함이 확 몰려왔다. 검찰총장 출신 대선 주자는 사소한 의혹만 제기돼도 ‘고발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정치권도 툭하면 “검찰은 수사 안 하고 뭐 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발 사주 의혹’ ‘대장동 의혹’처럼 석연찮은 사건들엔 미치지도 못하는, 온갖 잡다한 사안들을 놓고도 정치인들은 검찰을 불러대기에 바빴다. 대선 정국엔 상대를 벌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충만했다.

선데이 칼럼 10/30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선 가장 큰 정치 이벤트다. 한데 우리나라에선 대선이 ‘검찰 이벤트’가 된 지 좀 오래됐다. 대선 철에 검찰이 가장 바빠지는 건 우리나라 루틴(routine)이기도 하다. 실제로 각 대선 철마다 진행됐던 기념비적 사건과 수사에 관한 기억만 살짝 더듬어봐도 ‘DJ 비자금 사건’ ‘김대업 사건’ ‘BBK 의혹’ 등이 금세 몇 가지가 떠오른다. 대선 주자와 연관된 사건들은 대선 철마다 터졌고, 해당 사건의 수사로 어수선한 가운데 대선이 치러졌다.

그러니 대선 주자들의 저급함이나 욕망의 적나라함이 이번에 정도가 더 심해진 건 맞지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다. 대선판에 ‘정치’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정치보다 고소와 고발로 먼저 내달리는 정치권도 새로울 건 없다. 물론 여기서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함은, 민주주의 정치란 대화·타협·설득·의지의 기술이라는 순진한 상식을 말하고 싶은 내 기준에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그들은 늘 하던 대로 하고 있는데, 이걸 보고 있는 나는 갑자기 왜 이렇게 지치고 넌더리가 나는 것일까.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각 유력 후보마다 30%대 지지율에 60% 안팎의 비호감 비율을 기록한 걸 보았다. 비호감은 무관심이나 잘 모르겠다는 반응과 달리 적극적으로 ‘싫다’는 의사표시다. 많은 국민이 나처럼 지쳐서 ‘싫다’고 외치기 시작한 건 아닐까. 그런데 국민 3분의 2 가까이가 싫어하는 그들 중 누군가 대통령이 된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권 중반까지 정치를 추동한 건 ‘대결의식’이었던 것 같다. 하나 그 이후부터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으로 이어진 정치 추동의 정서는 ‘혐오’다. 정권만 교체하면 뭐하나. 우리를 기다리는 건 어쩌면 더 깊어진 혐오 정치, 고소·고발로 엄포 놓고 검찰 동원해 해결하려는 또 한 명의 대통령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번 대선 주자들은 대거 ‘피고발인’, 검찰이 혐의의 경중을 가리고, 위법 여부를 가려줘야 하는 현행법상 ‘피의자’들이다. 피의자들끼리 벌이는 대선. 정치는 무시하고, 고소·고발을 애호하는 정치인이 만들어낸 진풍경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A. 토크빌)고 했다. 좀 더 수준 높은 정권과 정부를 원한다면, 이젠 국민 스스로도 수준을 높이기 위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때가 된 건 아닐까. 사실 고소·고발이 먹히는 것도 세계에서 유례없이 고소·고발을 즐기는 우리 국민의 문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고소·고발 건수는 연평균 50만 건 안팎. 우리보다 두 배 넘는 인구를 가진 일본보다 건수로만 40배가 넘는다.

우리는 검찰의 정치화와 기소편의주의를 비난하며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한데 툭하면 검찰로 달려가 고소·고발을 남발하며 그들을 편 가르기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대선 철만 되면 유력 후보의 죄를 빨리 밝혀내라며 검찰을 닦달하는 건 또 누구인가. 우리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검찰, 국익에 열성인 정부를 가질 만한 수준은 되는가. 이제 이 저질 정치에서 벗어나 좋은 정부를 갖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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