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당시 서남지역의 3개 성(省)은 국민당 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대륙을 떠나지 않았다. 중공 서남국 서기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지휘하는 중공야전군의 포성이 마지막 체류지 청두(成都)를 압박하자 12월 10일 오후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장제스, 대륙서 실패한 이유 연구·분석
대만에 온 장제스는 800만 대군과 500만 당원을 자랑하던 국민당이 대륙에서 무너진 이유를 연구하고 분석했다. 매주 양밍산(陽明山)의 혁명실천연구원에 당 고급간부와 군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용이 자책과 반성이다 보니 설득력이 있었다. “항일전쟁 승리 후 우리는 승리에 도취했다. 2년 안에 공산 비적들도 소탕할 수 있다는 나의 장담은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국내외의 조력에도 불구하고 좌절했다.” 교육정책 실패도 자인했다. “전쟁 기간 국가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 당은 당 구실을 못하고, 군도 군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국민도 국민답지 못한 이유가 있다. 학교 교육이 불량했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교사의 도리를 못하고 제자들도 스승을 불신했다.” 실패의 원인도 외부에서 찾지 않았다. “국민당은 국민을 위한 정당을 표방했다. 전쟁 승리 이래, 동지들은 타락했다. 기절(氣節)을 상실하고 50년간 이어오던 혁명 도덕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법관 교육도 반성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추함이 극에 달했다. 칼 들고 구걸하는, 걸인(乞人)만도 못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머리 구조가 복잡하고 산만하기가 이를 데 없다. 범죄자 잡는 것보다 만드는 재주가 더 탁월하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의 자질도 실패의 원인으로 꼽았다. “지휘관이란 자들이 사창가 출입과 도박, 먹고 마시는 일에 목을 맨다. 우리의 적인 공산비적은 군기가 엄격하고 지휘관들의 사고와 행동이 모범적이다. 국민혁명군의 창군 목적은 단순했다. 애국구민(愛國救民), 나라를 사랑하고 군민을 도탄에서 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다. 애민은커녕, 온갖 명목으로 주둔지 주민들을 갈취하고 근심거리만 안겨주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 현실이다.”
지식인들을 혹독히 비난하며 중공과의 두 차례 회담도 반성했다. “교수와 청년학생 반 이상이 중공을 감쌌다. 적의 도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우리는 전쟁에서만 패한 것이 아니다. 적과의 불필요한 회담으로 실패했다. 적에게 시간만 벌어줬다.” 베이징에서 장제스의 훈화 내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박장대소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알면서도 빼먹은 것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인민에 의지했지만 옛 친구 장제스는 미국에 너무 의존했다. 지금은 나보다 미국을 더 원망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약한 자는 버린다.”
1990년 봄, 국민정부 마지막 상하이 시장 우궈쩐(吳國楨·오국정)의 비서를 역임했던 황먀오즈(黃苗子·황묘자)가 홍콩에서 구술을 남겼다.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중국 인민이 청나라 봉건황조(皇朝)를 타도한 후 깃발을 올린 혁명정당이다. 이상과 신앙은 달라도 반제(反帝)와 반봉건(反封建)이라는 큰 목표는 일치했다. 장제스는 근본이 틀려먹었다. 자신이 국부로 추앙하던 쑨원의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를 파기하고, 중공을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취급했다. 미국은 남의 싸움에 먼저 끼어드는 법이 없다. 구경만 하다 이길만 한 곳을 지원한다. 전세가 역전되면 지원 대상을 바꾸는 것이 관행이다.”
미국인 47%, 신중국과 우호 관계 원해
6·25전쟁에서 미·중 양국은 총구를 맞댔다. 신중국은 윤번제로 25개 야전군과 16개 포병사단 외에 수송사단 10개와 12개 공군사단을 투입했다. 미국도 만만치않았다. 육군과 공군의 1/3, 해군의 1/2이 한반도에서 중국 지원군과 자웅을 겨뤘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대만정책이 변했다. 대만의 국민당 정권을 지지하고 신중국의 대만 주권 주장을 부인했다.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돈과 전략물자를 쏟아부었다. 6·25전쟁 정전협정 104일 후 닉슨 부통령이 대만을 방문했다. 외교부장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와의 단독회담에서 공동방어조약 체결을 놓고 입씨름을 했다. 예는 직업외교관은 아니었다. 개항지 광저우(廣州)의 부유하고 문화가 넘치는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고급교육을 받았다. 10살도 되기 전에 13경이 머리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대가들에게 익힌 서예와 4군자도 일품이었다. 중학 시절 학생시위 기웃거리자 조부가 기겁했다. 미국까지 데리고 가서 명문 중학에 입학시켰다. 미국과 영국 오가며 서구문화에 넋을 잃었다. 학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천하의 후스(胡適·호적)도 예궁차오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귀국 후 후스와 함께 문학잡지 신월(新月)을 창간했다. 영국 시절 매료됐던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를 멋진 중국어로 소개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닉슨은 예궁차오의 열변에 귀가 솔깃했다. 대한민국 외무장관 변영태와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한 지 1주일 후였다.
신중국과 원수가 된 미국은 베이징의 눈치를 봤다. 시간을 끌었다. 이듬해 겨울이 되어서야 대만의 자유중국 정부와 공동방어조약을 체결했다. 그사이 제네바에서 한반도와 베트남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신중국은 건국 후 처음 참여하는 국제회의에 대규모 대표단을 꾸렸다.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51일간, 6·25전쟁 참전국을 포함한 19개국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전 국제연맹회관에 모였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신중국은 참석한 보람이 있었다.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47%가 신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원했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40%였다.
미국과 신중국은 냉전 시대에도 등을 완전히 돌리지 않았다. 키신저가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하기 전까지 제네바와 바르샤바에서 136차례 대사급 회담을 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