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에밀 시오랑을 읽는 가을 오후

- 2021. 10. 29.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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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지독한 비관주의자에 열광
지금은 '생의 한가운데' 있는게 좋아

인생은 태어난 자가 겪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처음 겪으니 우리는 자주 시행착오나 실수를 저지른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다. 살고 죽는 일은 우연일 뿐이다. 태어남이 우연의 지배 아래에서 일어난다면 죽음은 필연의 일이다. 한 번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저 어린 시절, 내가 필멸의 존재라는 인식론적 깨달음은 내 머리 위에 떨어진 최초의 번갯불이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 일찍 온 깨달음이었다. 나는 필멸의 존재로서 밥을 먹고, 필멸의 존재로서 잠을 자고, 필멸의 존재로서 깨어나 돌아다녔다.

죽음이란 한 존재를 삼켜버리는 ‘무례한 무한’이다.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오랫동안 그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나 이 해답이 없는 물음이 만드는 불가사의한 공포에서 발버둥친 경험이 있으리라. 이 무렵부터 나는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에 빠졌다. 나는 성경을 독파하고 성서고고학 책 따위를 구해다 읽었다. 종교의 울타리를 맴돌며 그 안쪽을 기웃거렸지만 신앙의 은총으로도 내 존재의 헐벗음은 가려지지 않고,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놓여나지를 못했다.
장석주 시인
스무 살 무렵, 그렇게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져 방황했다.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시립도서관을 드나들며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시절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니체, 니코스 카잔차키스, 에밀 시오랑이다. 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믿었다. 처음 겪는 젊은 혈기의 쓸모없음에 당황하고, 지나치게 많이 주어진 자유에는 현기증을 느꼈다. 한 줄기 햇빛에 감동을 받고, 고전음악을 듣다가 오열했다. 불안에 대한 처방을 비관과 회의에서 구하던 시절이었으니, “인간이므로 우리는 나쁜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시오랑의 비관주의에 열광한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름이 떠난 자리에 하늘은 높고 푸르며 산색은 온통 고운 단풍으로 물든다. 나는 어린 짐승이 소금을 핥듯이 책을 아껴가며 느리게 읽는다. 가을 오후, 파주의 한 단골카페에 나와 시오랑의 책을 읽는다. 생애 처음인 듯 맞는 이 가을은 참혹할 만큼 아름답다. 이 계절의 청신한 감각을 살아서 누리는 기쁨으로 가슴은 벅차오른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나를 견딥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불행하다고 믿는 사람, 인간은 자연이 자신에게 저지른 테러라고 말하는 사람, 태어났음의 불편함에 진절머리를 치며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시오랑이 바로 그런 철학자다.

시오랑은 1911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26세 때 국가장학생으로 프랑스에 간 이래 파리에 정착해서 산 철학자다. 40세 때까지 대학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니체, 베르그송, 키르케고르에 대한 논문을 쓰고, 철학의 다양한 명제를 아포리즘 형식으로 풀어냈다. 밥 먹을 돈도 없고 세를 낼 돈도 없이 쪼들리는 가난뱅이로 살았으나 다른 이들이 다 품는 야심이 없었다. 1995년 알츠하이머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독한 비관주의자로, 회의주의자로서 살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매우 꼿꼿했다.

칠레 시인 니카노르 파라의 시집에서 “각각의 새는 진정 날아다니는 묘지다”라는 구절을 만났다. 자명한 사물이나 현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인의 뾰족한 직관이라니! 걷는 사람도 죽고, 공중에 나는 새도 죽고, 무릇 숨결이 붙은 것은 다 죽는다. 죽음 앞에서 유독 볼품없게 쪼그라드는 인간에게 살아 있음은 과도한 무(無), 활동하는 무, 아무것도 아님, 거대한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내가 의미의 존재라는 믿음이 산산조각나더라도 “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이 전부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은 가을이니까! 먼 곳에 착한 누이들과 까르륵 잘 웃는 조카들이 살고, 가까운 산기슭엔 구절초와 쑥부쟁이와 벌개미취가 한꺼번에 꽃을 피운 채 바람에 흔들린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어서 좋다. 참 좋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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