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가을을 보내며

- 2021. 10. 29.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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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2차 접종 후 무기력 빠져
산길 산책하며 벗어날 방법 골몰
다툰 어머니 위해 호박죽 끓여
걷고 먹고 자는 '일상'이 치료제

지난 8월 중순에 백신 2차 접종을 마치고 난 후 몸과 마음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기운이 없고 무기력해지고, 그러다 보니 의욕도 차츰 사라져갔다. 백신 후유증인가? 시간이 가면 나아지겠지, 여기고 싶었는데 이 증상이 이달까지 이어져 접종을 받았던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매일 운동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햇볕을 쬐고 매일 걷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할 것. 그날 내가 받은 처방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지하철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의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면역반응의 차이에 따라 회복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을 테니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게 느껴졌다. 지하철역을 지나 오래된 아파트촌 뒤쪽으로 길을 돌았다. 청룡산 입구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가을 오후,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이 무력감이 혹여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같이 사는 어머니와 다툼을 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시간이 가면 나아지려나.
조경란 소설가
집에 가자 커다랗고 둥근, 늙은 호박 하나가 식탁 한쪽에 올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어디 이웃에게 받아온 것일까.

최근 무력감을 이겨내던 아는 이들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 다른 장소로 옮겨간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한약이나 양약의 도움을 받는 사람, 심리학 책을 찾아 읽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옛날 일기장, 수첩들을 뒤적거려보며 그동안 이 의욕 없음을 이겨왔던 방법들을 새삼 찾아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발효빵 굽기, 동물원이나 식물원 가기, 요리책 읽기, 매일 칠천보 걷기. 대충 이런 일들을 하면서 그 시간을 건너왔던 듯하다. 매일 칠천보 걷기를 다시 시작하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새로 산 요리책, 음식에 관한 산문집들을 읽기 시작했다.

특수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든든한 한끼 식사 비법을 설명해주는 ‘비건 홈카페’에서는 채소간장떡복이와 고구마샌드위치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독일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도리스 되리의 ‘미각의 번역’을 읽다가는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의 소중함, 한 알의 과일에 담긴 유용한 이야기들을 배운다.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려면 빛과 태양이 필요하다는 과일 수박이 여름의 정수(精髓)라고 했나. 그리고 호박에 관해서 쓴 글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호박 한 통에는 거의 1000개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이 책의 부제는 ‘요리가 주는 영감에 관하여’이다. 책들을 덮고 나자 입에 침이 고이고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무기력함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그동안 잃고 있던 것이 또 있었다고.

가족들이 잠든 밤, 앞치마를 두르고 늙은 호박을 자른다. 단단하고 잘 익었다. 천 개도 넘어 보이는 씨를 제거하고 호박을 삶고 믹서기에 갈아 끓이기 시작한다. 불린 찹쌀도 넣고 바닥이 눋지 않도록 계속 젓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호박죽을 끓이는 밤. 눈앞에 온통 환한 노란색이다. 문득 노란색을 유난히 좋아했던 어떤 편집자, 노란색 레몬에 관한 짧은 단편소설, 노란색 손수건을 동네 나무들마다 매달아 놓은 이야기 등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어떤 영감들일까?

딴생각에 빠져도 지금은 불 앞에서 호박죽을 정성껏 끓이는 일이 우선이다. 한 통의 호박이 익기까지의 시간들이 저 샛노란 노랑에 응축돼 있는 듯하며 어떤 일은 시간이 가도 노력하지 않는데 나아지는 일이 없을 때도 있으니까. 호박죽을 만들며 생각한다. 이것을 혼자 먹는다면 그건 ‘말하기’일 것이고 누군가와 같이 먹는다면 그건 ‘대화’일 거라고. 말하기도 중요하지만 대화는 그냥 음식을 섭취하는 게 아니라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다는 대화 전도사, 시어도어 젤딘의 말도 떠오른다.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따뜻하고 노란 호박죽을 놓고 어머니와 모처럼 마주 앉고 싶다. 숙제 같았던 늙은 호박 한 덩이가 심심한 진미(珍味)를, 어쩌면 이 무기력함은 걷고 먹고 자고 제때 일어나는 일상적 움직임만으로도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남기는 듯하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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