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화장실에 다녀온 오전 9시47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림책]

백승찬 기자 2021. 10. 2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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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09:47
이기훈 글·그림
글로연 | 90쪽 | 2만5000원

통영항은 휴가 인파로 북적인다. 신난 표정의 사람들이 비진도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맑은 여름날 오전 8시50분이다.

빨간 토끼인형을 안은 소녀가 주인공이다. 소녀는 커다란 물안경을 쓴 채 물놀이를 기다린다. 어른들이 배를 따라온 갈매기에 새우깡을 던져주자, 소녀도 아빠 품에 안겨 바다를 바라본다. 소녀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바다 안에 빨간 토끼인형과 자신같이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엄마 손을 잡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엄마가 토끼인형을 들고 바깥에서 기다린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소녀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 때는 오전 9시47분이다.

이야기는 이상할 것 없이 차분히 전개되지만 자세히 살피면 곳곳에 미스터리가 있다. 여객선에 탑승하는 승객 일부는 동물의 머리를 갖고 있다. 동물이 짝을 지어 배에 오르는 모습이 노아의 방주 같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소녀의 옷은 왜 그리 흠뻑 젖었을까. 열린 창으로 들이친 바닷물 때문일까.

갈매기가 소녀의 인형을 빼앗아간다. 인형은 바다 저 멀리로 사라진다. 어느덧 섬에 도착한 소녀는 혼자 모래놀이를 즐긴다. 그때 파도에 밀려온 토끼인형이 나타난다. 소녀는 물안경을 쓰고 인형을 찾으러 나선다. 인형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조금씩 소녀로부터 달아난다. 소녀는 깊고 어두운 바다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소녀가 바다에서 겪는 일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거대한 고래, 쓰레기 산의 모습이 이어진다. 고래떼는 육지를 향해 헤엄치고, 해안도시에는 해일이 밀려온다. 날뛰는 바다의 모습이 무시무시하다. 소녀와 인형은 목숨을 건 탈출에 나선다.

작가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언급했다. 크로노스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객관적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인간의 목적, 감정이 개입된 주관적 시간이다. 소녀의 여정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혼재돼 있다. 소녀가 화장실에 다녀온 오전 9시47분에 많은 일이 일어난다.

글 없이 그림으로만 이어지는 책이다. 모든 장면이 극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데다, 암시적인 장면도 많아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렵다. 노아의 방주와 같은 배, 해양 쓰레기를 휘감은 고래, 문명을 쓸어버리려는 기세의 바다를 보면 소녀, 궁극적으로 작가가 꾼 악몽의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지구 종말의 비전을 경험한 소녀는 오전 9시47분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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