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이 "피고 이름은?" 묻자 "나는 박열이다" 반말 대답[동아플래시100]

이진 기자 2021. 10. 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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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3월 1일

플래시백

박열이 마침내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열 말입니다. 붙잡힌 지 2년 6개월 가까이 지난 1926년 2월 말이었죠. 그런데 옷차림이 특이했습니다. 옛날 조선 관리들이 입던 예복에 사모관대까지 했죠. 박열 왼쪽에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쪽찐 가네코 후미코가 앉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가만가만 얘기를 나누기도 했죠. 동아일보 1926년 3월 2일자에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뒤 일제는 박열이 이끄는 ‘불령사’ 회원들을 체포했습니다. 기나긴 예심을 거쳐 기소된 사람은 박열, 가네코, 김중한 3명뿐이었죠. ‘불령사’를 폭동을 모의한 비밀결사로 몰아가려 했지만 증거가 없었습니다. 다만 박열 등 3명은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며 대역죄로 엮어 넣었죠.


이미 박열은 21차례, 가네코는 23차례 혹독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웬만한 이들이라면 벌써 심신이 무너졌겠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죠. 박열은 재판이 열리기 전 조건까지 내걸었습니다. 첫째 나를 죄인 취급 말고 ‘피고’라고 부르지도 말라. 둘째 법정에서 조선 예복을 입겠다. 셋째 의자도 재판장과 같은 높이로 설치하라. 넷째 재판 시작 전에 선언문을 낭독하겠다. 들어주지 않으면 법정에서 답변을 안 하겠다고 일방 통고했습니다. 재판장은 ‘말도 안 된다’며 거부할 수만은 없었죠. 박열은 ‘소위 재판에 대한 나의 태도’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특권계급에게 준다’는 글을 답변 대신 낭독했습니다. 각기 국가권력의 재판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드러내며 천황제의 허구성을 담은 글이었죠.

왼쪽은 동아일보 1925년 11월 27일자에 실린 불령사 가 있던 건물과 박열, 가네코 후미코 얼굴사진. 오른쪽은 동아일보 1926년 3월 2일자에 실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첫 재판 사진.

하지만 3월 말 일제 검찰과 법원은 사형 구형에, 사형 선고로 되갚았습니다. 폭탄을 찾아내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래서였을까요? 검찰은 처음엔 ‘대역사건’이라고 선전했다가 슬그머니 ‘불령사사건’으로 낮춰 불렀습니다. 선고 열흘 만에 천황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것만 봐도 속사정을 짐작할 수 있죠. 사형이 선고되자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라고 소리 질렀고 가네코는 ‘만세’를 외쳤죠. 두 사람은 선고 이틀 전에 혼인 신고서를 내 공식 부부가 됐습니다. 4월 서로 다른 감옥으로 옮기게 되자 박열은 가네코의 손목을 잡고, 가네코는 박열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죠.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인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을까요?

①1922~23년 경의 가네코 후미코 모습 ②동아일보 1926년 7월 31일자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 자살 관련 기사의 제목 ③1926년 11월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가져와 안장한 경상북도 문경시 팔영리 묘소.

3개월 뒤 가네코는 감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박열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23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죠. 무기징역 감형 은사장을 형무소장 앞에서 갈가리 찢어버렸던 당찬 여인의 최후라기에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담당 변호사도 ‘주의(主義)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두려운 것이 없다는 강렬한…과연 사나이다운 여자였다’고 평가했었거든요. 남편 박열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고 전향을 강요당했으며 글 쓰는 일조차 어려웠던, 질식할 것만 같았던 상황 끝에 선택한 길이었던 듯합니다. 앞서 법정에서 ‘차라리 죽어서 그 뜻을 부군 박열에게 바치고 조선 땅에 내 뼈를 묻음으로써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친다면 그 뜻은 언젠가 누구라도 알아주게 될 것이 아닌가?’라고 한 말이 유언처럼 남았을 뿐이죠.

①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자에 실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예심법정에서 두 사람이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일제가 보도통제를 하는 바람에 사진이 찍힌 지 1년이 지나서야 공개됐다. ②사진과 함께 유출된 박열의 예심결정서 사진. 동아일보 1926년 9월 1일자에 게재됐다.

박열 부부 사건은 8월에 한 번 더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습니다. 예심 당시 박열 앞에 붙어 앉은 가네코가 책을 읽는 사진이 유출됐기 때문이었죠. 예심판사가 ‘대역사건’을 뒷받침할 진술을 얻어내기 위해 두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찍어줬던 사진이 흘러나갔던 겁니다. 일제가 철저하게 보도를 통제했지만 일본 야당인 정우회와 정우본당 등이 옥중의 대역죄인을 우대하고 천황을 속여 감형까지 해줬다며 여당인 헌정회를 공격하는데 사진을 이용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갔죠. 결국 이듬해 헌정회 내각은 총사퇴하고 정우회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민족의 장벽을 넘어선 박열 부부의 투쟁이 내각 붕괴의 도화선이었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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