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달성공원에서 경마를?' 한국경마 100년의 흔적, 대구경마장을 찾아
2022년은 이 땅에 공인 경마가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9개의 지방경마장 중 휴전선 이남에 있는 4개의 경마장을 돌아보는 한국마사회 말박물관 기획, 두 번째 대구경마장편이다. 대구경마구락부의 법인 인가는 1927년, 경마는 1929년 시작됐다. 1933년 정식 공인 경마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금의 신천 동신교 동인성당 부근에 있었던 북리연구소(종두법연구소)의 대구출장소 부지, 달성공원 등지에서도 경마를 시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대구경마장도 군산경마장과 마찬가지로 그 터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대구근대사 전문 블로거 차경환 씨의 도움으로 해방 전 지도를 입수했다. 다행히 해당 지도에서 기준점이 되는 대구역과 철로, 달성공원과 침산 등이 지금도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조금은 수월하게 옛 대구경마장의 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공인경마장 설립 이전 임시 경마장으로 이용했던 북리연구소(대구출장소)와 달성공원은 대구역에서 각 2㎞ 떨어져 있다. 춘계와 추계 연 2회 열렸던 지방순회경마 일정에 따라, 기차로 대구역에 도착한 마필들이 경마장으로 이동하는 데는 20분 정도가 소요됐을 것이다. 군산경마장과 마찬가지로 역에서 시내 중심가로 퍼레이드를 한 후 경마장으로 이동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경주 일정을 보면 군산경마장에서 온 마필에 대구 지역 유지들의 마필이 더해져 5일간 경주가 열렸고, 다시 대구역을 통해 옛 부산경마장으로 이동했다. 시행 초기인 1930년 대구경마장 출주두수는 356두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같은 해 경성경마장 232두, 부산경마장이 299두였던 것과도 비교되는데, 기본적으로 전국을 순회하는 경주마 외에 대구지역 유지들이 소유한 마필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인 경마제도 이전에는 한강 백사장을 비롯해 전국 다수의 강변에서 경마를 개최한 사례가 확인된다.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은 마필이나 기수가 경주하기에 비교적 안전한 조건을 제공하며 경주 전후 마필을 씻기고 물을 먹이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제1회 경주가 열린 북리연구소는 대구역에서 멀지 않은데다 금호강의 지류인 신천에 접해 있다는 점이 개최지의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공인 규격의 경마장 설립 이전까지 사용된 달성공원의 경우에도 신천의 지류인 달서천이 흘렀으며 실제 둘레길 거리가 약 1600m 정도로 걷는 데에만 20~30분 소요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외곽이 언덕처럼 솟아있는 지형이라 경주는 내부에 조성된 정원 안에서 시행하고 사람들은 그 외곽에서 관람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늘에서 보면 내부 정원의 형태도 원형에 가까워 타원형인 경주로와 비슷하게 경기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1932년 조선경마령 발표 후 공인경마장 이외에서는 마권을 판매하는 경마경기가 불가해졌고 마침내 대구에도 1933년 10월 25일 공인 규격의 주로가 들어선다. 위치는 대구역에서 약 3㎞ 거리에 있는 당시 행정구역상 원대동(현재의 북구 노원동) 일대. 약 4만평(현재 서울경마공원이 35만평)의 부지에 주로 약 1500m, 내부에는 1000m의 연습장까지 갖추었으며,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계단식 관람대에는 약 4000명을 수용할 수 있어 경성경마장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기사도 확인된다.
이러한 대구경마장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는데 바로 근대 조선 최고의 사진작가로 꼽히는 최계복의 작품 '가을의 경마'다. 일정하지 않은 규격의 판재를 꽂아 주로를 표시한 펜스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말과 기수 그리고 배경에 병풍처럼 펼쳐진 산맥까지, 대구경마장의 생생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전국 9개의 공인경마장은 매출이나 입장인원 등 계속 성장을 이어가다 1941년 말 시작된 태평양전쟁으로 서서히 폐쇄되기 시작해 군산(1941)과 신의주(1942), 웅기(1942), 함흥(1943), 청진(1943)의 경마장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은 1942년 조선마사회를 설립했다. 설립 목적에 드러낸 바와 같이 군마와 산업용 마필 확보를 위해 전국 경마 시행체를 통합, 감독권을 행사했으며 최초로 마권세(국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전시나 불황에도 불구하고 남은 경성과 부산, 대구, 평양 네 곳의 경마장은 입장인원이나 마권발매액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일본인 마주들을 중심으로 진행했던 경마가 점차 광범위한 서민들의 오락거리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 곳 경마장의 기록을 보면 해방을 맞은 1945년 춘계경마까지 진행하고 해방을 맞이한 것으로 나온다.
대구경마장도 해방 후 1946년 6월 경마를 재개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7월부터 대구경마장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며 주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현지인들이 종전 후 황폐해지고 개간으로 농지화된 경마장의 재건에 나섰다. 1,640m의 주로를 수리하고 가건물로 매표소 등을 1957년, 1958년 경마를 시행하였으나 아쉽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959년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했고, 세금 체납과 부채에 허덕이던 마사회는 매각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원대동 대구경마장은 1961년 말 개인에게 매각되며 30여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이 땅에 경마가 시행된 지 내년이면 100년을 맞는다. 30년이라는 시간동안 오락거리를 제공하며 우리 민초들의 무거운 삶의 무게를 잠시라도 잊게 해줬을 대구경마장을 기억해본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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