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독서의 황금시대'는 끝났는가

안선희 2021. 10. 29.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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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이래 일본의 독서사
'백만 잡지' '엔본 붐' '문고 붐' 등
20세기 들어 독서 문화 꽃피지만
인터넷 확산 뒤 책의 위상 바뀌어

독서와 일본인
헤이안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독서로 보는 일본의 사회상
쓰노 가이타로 지음, 임경택 옮김 l 마음산책 l 1만7500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방 안에 파묻혀 한 권 한 권 꺼내 읽어가는 그 기분, 황후의 자리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본 헤이안 시대, 한 중급 귀족의 딸(스가와라노 다카스에노무스메)이 자신의 회상록 <사라시나 일기>에 쓴 구절이다. 그가 탐독했던 책은 당대의 인기소설이었고 이후 고전으로 자리잡은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였다. <독서와 일본인>의 지은이는 이 장면을 가리켜 “일본인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책을 읽게 된, 가장 이른 시기의 독서 현장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책은 혼자서 묵묵히 읽는다. 자발적으로, 대개는 자신의 방에서’라는 현재 독서의 방식이 이미 이 시절 시작됐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독서와 일본인>은 흔히 ‘독서강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독서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를 각 시대의 인기 서적, 저자와 독자층, 출판 기술, 교육 제도, 경제사회상 등 여러 요소를 엮어 보여준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헤이안 시대(794~1185년)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역사를 훑어본다. 교육의 확대와 인쇄술의 발달로 책을 읽는 계층이 소수의 귀족들에서 서민들에게까지 넓어지고, <사라시나 일기>에서 단초가 보이는 개인적인 독서 방식이 자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이 핵심이다.

후반부에서는 지은이가 ‘독서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20세기가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1938년에 태어나 1962년부터 편집자이자 출판평론가로 활동해온 지은이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겪은 과정과 겹쳐지는 대목도 적지 않다.

지은이는 20세기를 “지식인과 대중, 남성과 여성, 돈과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별 없이 사회의 모든 계층에 독서하는 습관이 확산”된 시대, ‘누구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새로운 상식으로 정착된 시대라고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문해율은 100%에 가까워지고, 출판도 하나의 산업으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특히 1920년대 출판계에서는 독서의 대중화와 책의 상품화를 이끈 세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인터넷의 확산 등으로 일본에서 서적 매출은 1996년 이후 하락 추세에 놓여 있다. 사진은 도쿄의 중고 서점 모습. 도쿄/AP 연합뉴스

첫번째는 1924년 출판사 고단샤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종합지 <킹>을 창간해 ‘백만 잡지’가 된 것이다. <킹>은 창간호가 74만부 팔린 데 이어 1926년에는 90만부, 1928년에는 140만부가 팔린다.

두번째는 1926년 출판사 가이조샤의 <현대일본문학전집> 63권을 시작으로 불붙은 ‘엔본 붐’이다. ‘엔본’은 권당 1엔의 염가판 전집으로, 독자들은 매달 1엔씩을 내고 그 달 발행된 책을 받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저서에서 “이러한 문학 전집이 새롭게 배본되면서 학교 휴식 시간에도 ‘너 그거 벌써 읽었어?’라는 대화가 오고 갔다. (…) 일본이나 세계 유명 작가의 이름 혹은 유명한 작품의 제목 정도는 읽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알고 있는 게 일반적으로 ‘세상의 상식’이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엔본 시대 이후”라고 쓰고 있다.

세번째 사건은 1927년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이와나미문고로 시작되는 소형 저가본 ‘문고’의 유행이었다. 문고를 출판하는 쪽에서는 전집 단위로 사야 하는 엔본을 비판하며 갖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엔본 붐, 문고 붐에 대해 지은이는 ‘교양’이나 ‘공부’를 위해 책을 읽겠다는 욕구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른바 ‘소시민’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택의 책장에 수십 권 수백 권씩 책을 소유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도 이 시기부터다. 이런 현상은 ‘책이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자신의 윗 세대부터 바로 아래 세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이나 남의 집 책장에 있던 엔본 전집이나 문고판으로부터 독서 역사를 시작한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전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침체에 빠졌던 일본 출판계는 패전 몇년 뒤부터 부활하기 시작해 1980년대에 정점을 이룬다. 지은이는 “196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사반세기야말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독서의 황금시대로서 20세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씩 균열이 생겨났다. 1960년대 고도 성장의 영향으로 일본은 빠르게 소비사회화가 진행된다. 단카이 세대(1947년~1949년 출생)는 책을 읽고 버리는 소비재로 다루기 시작한다. 잡지들은 활자 중심에서 비주얼 중심으로 변모하고, 고전이나 인문학 등 ‘딱딱한 책’ 중심이던 문고들도 대중문학이나 에세이 등 ‘부드러운 책’ 위주로 바뀐다.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독서에 대한 관심은 더 줄어들었다. 계속 상승하던 서적의 연간 매출액은 1996년 1조931억엔에 이른 뒤, 다음 해부터 하강 추세로 전환된다. 만화와 잡지 역시 이즈음부터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갓 출간된 신간밖에 팔리지 않고 특히 ‘딱딱한 책’은 더 팔리지 않게 됐다. 전철 안에서 많은 사람이 책이나 잡지를 읽고 있던 풍경도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전철이나 버스에서 혼자서 묵묵히 소형 휴대용 단말기를 열심히 보고 있다.” 지은이는 결론 내린다. 독서의 황금시대는 드디어 종말을 맞이했다고.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비록 책이 모든 미디어의 중심에 놓였던 시대는 지나갔을지라도 책 자체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 “아마도 나 같은 ‘노년 세대’가 사라져버린 후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책의 매력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독서 습관을 재구축해갈 것임이 틀림없다”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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