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왜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나?
[고구려사 명장면-135]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전쟁에 대해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나마 약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신라인의 기록 덕분이다. 이런 기록이 남게 된 이유는 신라와 고구려 유민들이 함께 당과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부흥을 외치는 고구려 유민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신라 역시 자신의 존망을 걸고 당과 전쟁을 치렀기에, 적어도 전쟁 과정에서는 양자의 연대 의식이 높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양자 사이를 동맹이나 연합 관계라고 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고구려 유민들의 간절한 생존 의지를 신라가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성 고구려국의 복국 후 안승이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고구려 왕으로 책봉 받은 때부터 사실상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신라의 이해관계에 종속되고 규정되어 간 것이 양자 관계의 실상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당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신라인의 손에 의해 좌절하게끔 되어 있었다. 다만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종식될 때까지 양자의 주적인 당과의 전쟁이라는 공통된 목표가 유지되었기에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저버리거나 배신하는 불운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전쟁에 기대한 것은 최소한 신라가 백제 땅을 다 차지할 때까지 한반도 북부에서 당군의 남하를 저지해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는 다급해졌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또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킨 뒤에도 정작 신라에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나당연합군의 주력이 당군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신라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당당한 전과를 거두었고, 이런 신라군의 역할을 당이 정당하게 평가해 주기를 기대했다. 전 회에 언급했던 <답설인귀서>에서 백제 멸망 전쟁부터 고구려 평양성 전투까지 신라군의 전과를 상세하게 언급하는 내용을 보면 당시 신라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은 신라의 역할을 전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백제나 고구려의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난 것만으로도 신라는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고 우겼다.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설인귀서>에 이런 당의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심지어 <답설인귀서>에는 이런 대목도 보인다.
우리 신라 군사는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정벌을 시작하여 9년이 지나 힘이 다할 대로 다 하였지만 마침내 (백제,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세대 동안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해 은택을 입을 것이요, 인민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영공[이적]이 "신라는 전에 군대 동원 기일을 어겼으니 모름지기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공을 세운 장군들도 (명단에) 기록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는데,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라고 하여 장수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위 글에서 보듯이 당은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이런저런 핑계로 연합군으로서 신라군의 공적을 인정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다. 이는 백제 영토이든 고구려 영토이든 조금도 신라와 나누지 않겠다는 당 정부의 오만한 태도였다.
사실 신라인은 이전부터 속으로 크게 분노하고 있었지만, 이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 이를 신라에 귀속하기는커녕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당의 기미지배체체로 편입하고, 심지어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하고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를 복속시킨 모양을 취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664년과 665년에 신라 문무왕으로 하여금 웅진도독 부여륭과 동맹을 맺고 상호 침략하지 못하도록 강요하였고, 이후 노골적으로 백제 유민을 지원하며 백제 땅에서 신라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정벌이라는 현안이 있기 때문에 양국의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위의 <답설인귀서>에서 보듯이 당의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았고 바뀔 가능성도 없음을 깨닫고, 이듬해 669년 초부터 백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공세에 들어갔던 듯하다. 이때 신라의 공세 양상은 사료에는 전하지 않지만, 이에 대해 당 정부가 불만을 제기하자 신라 정부는 부랴부랴 5월에 김흠순과 김양도를 사신으로 당에 파견하여 사죄하면서 일단 외교상 수습을 시도하였다.
당은 이듬해 670년 정월에 김흠순을 돌려보냈지만, 김양도는 당의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결국 당에서 사망하였다. 외교 사신을 억류할 만큼 당의 불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김흠순을 돌려보낸 것도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표시한 지도를 신라에 보내 더 이상 신라의 공세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답설인귀서>의 한 대목을 들어보자.
7월에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펴서 살펴보니 백제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3~4년 사이에 주었다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니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 년 후에는 자손들이 그들에게 먹혀 없어질 것이다. 신라는 이미 한 국가이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오래도록 뒷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김흠순이 가져온 지도를 보고 당이 백제의 옛 땅을 신라에 귀속시킬 의도가 전혀 없음을 다시 확인하고, 이제는 당과의 전쟁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필자는 이 지도 사건이 신라가 당의 본심을 확실하게 깨닫고 나당 전쟁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때 당과 본격적인 전쟁을 결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670년 7월에 등장한 한성 고구려국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신라는 670년 7월부터 백제 유민 세력과 웅진도독부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백제 지역에서 신라와 당의 직접 충돌은 670년, 671년 2년 동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당 정부가 보낸 당 원정군의 주된 공격로는 해상을 통해서였다.
그렇다고 당이 해로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설인귀서>에 "고(高)장군[고간]의 중국 기병과 이근행(李謹行)의 변방 군사, 오(吳)·초(楚) 지방의 수군과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를 거론한 점을 보면 고간과 이근행 군대가 한반도 북부로부터 공략해가는 전술도 꾀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의 군사력으로는 남북 양쪽에서 전선을 유지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 육군은 백제 땅에서 웅진도독부와 백제 유민군과 전투를 벌였고, 수군은 황해를 건너오는 당의 수군을 상대해야 했다. 온 전력을 백제 땅에 집중해야만 했기에 북부 전선은 고구려 부흥군의 활동에 기대하였고, 고구려 부흥군은 성공적으로 당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해상을 통한 백제 영토로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뒤, 당은 육로로 한반도 북부에서 압박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당군과 치러야 할 전쟁의 주 무대는 자연스레 한반도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신라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신라는 이제 고구려 부흥군에게만 북부 전선을 맡겨둘 수 없었다. 아니 맡겨두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동안 한반도 북부에서는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백제 땅을 차지한 신라인들은 이제 슬슬 한반도 북쪽 땅도 자신의 휘하로 거두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쓸모가 있지만, 당과의 전쟁이 끝난 뒤도 대비해야 했다.
이렇게 고구려 부흥 전쟁은 점차 신라가 주도하는 나당전쟁으로 바뀌어갔다. 고구려 유민들이 기대했던 복국의 꿈도 배신당하기 시작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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