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출근] 성희롱, 음담패설 불편하다 했더니 '투명 인간'이 됐다

맹하경 2021. 10. 28.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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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10년째 다니고 있는 이 회사에서 여자는 저를 포함해 딱 두 명입니다. 다른 한 명은 간부의 아내이니 제가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동료 여직원은 없어요. 1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전 남초 회사 속 외딴 섬이 되었어요. 성희롱과 성차별, 음담패설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저 혼자예요. 여긴 '여자는 그렇게 다뤄도 된다'가 규칙인 그들만의 왕국이거든요.


"안아보자" "모텔 갈래?"가 농담인 곳

성희롱은 셀 수도 없습니다. 입사 초기 '성관계한 적 있냐'고 물었던 상관의 발언은 그 뒤로 쭉 이어진 막말들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이죠.

"시내 나가면 프리허그도 해주던데 5만 원 줄 테니 안아보자." "처녀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같이 자 봐야 해." "걷는 뒷모습이 요염하네." 이 상사의 언어폭력은 앞뒤 맥락도 없어요. 불쑥 튀어나와요. 결혼 계획 있냐는 질문 바로 뒤에 한 말이 "신용카드 줄 테니까 옷 벗어 봐"였고, 식사 후 부서원들과 같이 담배 피우면서 근처 모텔을 가리키더니 "저 모텔 언제 데려가 줄래?"라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그러곤 항상 웃고 넘기죠.

외부인이 있어도 똑같아요. 거래처 손님이 와서 차를 가져다 드렸는데 손님한테 "처녀라 남자만 보면 손을 떱니다"라고 했죠. 초면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모멸감과 수치심에 손님이 간 후 "그런 말은 좀 아닌 거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상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피식 하고 웃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이러더군요. "남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얘기가 뭔지 아냐? 여자 얘기야. 이런 것도 이해 못하면 사회생활 힘들다."

성차별적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사회생활 잘하는 여자들은 담배 못 피워도 남자들 속에 서서 연기 마시면서 대화한다." "남자들이 음담패설하면 여자가 더 심하게 얘기하면 돼." "여자들은 남자 기분 좋게 하면 되는 거야." 제가 들었던 말들입니다.

다른 직원들은 방관하거나 더하거나 둘 중 하납니다. 이 상사가 대뜸 웃으면서 "네 뱃살은 무슨 맛일지 궁금하다"라고 하니 옆에 있던 다른 상사가 손가락으로 제 아랫배를 쿡 찔렀어요. 회사 마당에서 벤치에 앉아 있던 현장 직원들이 지나가는 저한테 "남자친구랑 모텔 가봤냐?"라고 물어본 적도 있었고, 또 다른 상관은 커피 타는 법을 알려준다며 손을 잡거나 일부러 엉덩이 쪽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이었죠.

게티이미지뱅크

가랑비 옷 젖듯 무기력에 빠지다

항의하면 바보 취급했어요. 예민한 사람이라고 몰아세우고, 오히려 제가 이상한 거라고 했어요. 신입직원한테 저를 이혼한 사람이라고 거짓말하길래 "명예훼손으로 신고해야겠어요"라고 하니까 웃으면서 "신고해. 콩밥 한 번 먹어보자"라고 하던 분도 있었죠. 식사자리였는데, 옆에 있던 직원들은 뭘 한지 아세요? 눈길도 안 주고 밥만 먹었어요.

제 인격은 그렇게 죽어간 것 같아요. '그래, 일 잘하면 인정받을 거야'라고 생각해 보려고도 하고, 내가 상처 안 받으면 괜찮은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했습니다만 전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가 제 몸에 바늘을 한 개씩 꽂았는데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바늘투성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한 명의 직원이 아니라 성적 대상, 가십거리, 감정 쓰레기통이 된 현실이 절 아프게 했어요.


존재가 철저히 무시된 투명인간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사장님을 찾아가 그동안 당한 일을 말했더니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면 말해라"가 끝이었습니다. 왜 더 세게 항의하지 않았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장 보고 후 바로 보복이 시작됐고 전 더 움츠러들고 말았습니다.

가장 많은 가해 행위를 했던 상사는 직접 지시해야 하는 일을 다른 사람 통해 전달해 제가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나서 그 핑계로 아예 업무에서 절 빼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철저히 배제시켰죠.

그 상사는 손님 대접용 차를 가지러 가는 남자 신입직원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을 휙 뺏더니 저한테 들이밀었습니다. 원래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디자인을 시키기도 했어요. 그렇게 회사에서 전 손님 차를 타는 사람, 택배 부치는 사람, 복사하는 사람이 됐죠. 제 자신이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 괴로웠어요. 업무 면에선 그냥 투명인간이 된 거죠. 하루는 제가 사무실에 있는 걸 뻔히 아는 직원들이 나가면서 밖에서 문을 잠그는 바람에 갇힌 적도 있어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공포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오늘도 전 출근을 하고 있네요. 신입일 땐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그 후엔 잘릴까 봐 그냥 투명인간 상태로 남은 것 같아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그 상사는 "권력을 어떻게 쓰는지 아냐. 다른 사람이 다 반대했는데도 내가 널 뽑은 거야"라고 압박했어요. 이 사람은 회사에서도 능력자로 인정받고 제 인사권도 쥐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문과계열에서 진로를 트는 바람에 늦은 나이에 어렵게 취직했습니다. 이 회사가 동종업계에선 연봉이 꽤 높은 수준이란 점도 제 발목을 잡네요. 새 직장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이대로 지내야 할까요?

A씨(40대 여성·제조업 사무직)


'문제제기=퇴사' 아닙니다

상담을 위해 한국여성노동자회를 찾아온 A씨의 첫 질문은 "이거 성희롱이 맞나요?"였습니다. 오래 참아 온 분들은 본인도 모르게 피해자라는 인식 자체가 무뎌지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먼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피해자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희롱은 인권을 침해하는 엄연한 불법행위이니까요.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사내 절차를 통하거나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을 수 있습니다. A씨는 "조직문화를 볼 때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면 이곳에서 일할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처럼이라도"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괴롭지만, 이렇게라도 계속 출근을 하는 건 본인이 참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을 때 퇴사를 각오했다고 말합니다. 불안하고 겁이 나죠.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고 보니까요.

하지만 사직서를 낼 게 아니라, 문제를 지적하고 내가 요구하는 것을 전달한 뒤 처리절차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불안감과 두려움은 심리지원을 통해서 다스리면서 차근차근 증거를 확보하고 피해 경험을 정리해야 합니다.


①기록 ②목표와 방식 ③보호장치 3가지를 기억하세요

우선 첫 번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록입니다. 불편하고 불쾌했던 상황을 인식하면 바로 기록으로 남기세요. 일기를 써도 좋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비공개 게시글로 저장해 놔도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이런 일에 대해 카톡을 나누거나 직장 동료와 대화를 하고 그 내용을 모두 수집하세요. 사실 관계를 중심으로 기록하면서 내 몸과 마음의 상태, 회사 생활 등 주변 상황도 남겨두는 게 좋습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우선 내 권리와 내가 겪은 일의 법적 규정사항이 뭔지 전문상담기관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세요. 그걸 기반으로 행위자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등 합의, 내부 절차를 통한 징계, 손해배상 등 구체적 목표를 설정하셔야 합니다.

그다음 회사 취업규칙에 직장 내 성희롱 규정이 있는지, 사내 고충처리 절차가 있는지, 믿을 만한 상사나 동료가 있는지 확인해서 사내 절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어려우면 진정, 고소 등 구제 절차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절차를 시작하면서 반드시 '보호조치'를 요구하셔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안정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행위자와의 분리 배치, 유급 휴가 등을 제안하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문제제기로 인해 불이익이 없도록 회사에 명확한 조치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셔야 합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노동자회(대표번호 1670-1611)는 전국 11개 지부(서울·인천·부천·전북·광주·안산·부산·마산창원·대구·수원·경주)에서 '평등의전화'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차별과 성희롱을 비롯해 임금체불, 부당해고,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하는 불리한 대우, 폭언·폭행 등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겪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도와줍니다.

정리=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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