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지원도 포퓰리즘..과학이 정치에 휘둘리면 미래없어"

이새봄 2021. 10. 2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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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과학' 긴급좌담 ◆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 후보가 속속 확정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정치사안에 묻혀 과학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유력 대선주자 누구도 과학의 '과' 자(字)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이 때문인지 과학계 위기감이 고조되는 형국이다. 이대로 가다간 과학입국은커녕 후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보다 못한 과학계 '빅4'가 한자리에 모였다. 과학기술계 목소리를 대변하는 3대 한림원(과학·의학·공학)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수장들이다. 이들은 "현 정부에서도, 차기 정부를 이끌 대선 주자들에게서도 과학을 향한 관심과 열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날 선 비판과 우려를 쏟아냈다.

이번 좌담회는 대선을 반년여 앞두고 현 정부 과학정책 평가와 함께 새로 출범하게 될 정부에 과학기술의 현주소를 전달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 사회 = 남기현 벤처과학부장

―현 정부가 가장 잘한 점, 아쉬운 점을 각각 꼽자면.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이 2018년 20조원을 돌파한 지 3년 만에, 내년에 30조원에 가까운 29조8000억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기초 연구비 투자도 2017년 1조2000억원에서 2022년 2조5000억원까지 두 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국민이 체감할 만한 혁신정책 추진이 미흡했다.

▷한민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예산 늘린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연구비를 '쓰는 것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 최근에는 연구비 분배에도 포퓰리즘이 두드러진다. 지역, 성별, 연령별로 고루 분배를 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하지만 과학기술에서 성과를 내려면 탁월한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주는, 즉 '수월성'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연구비는 보조금이 아니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연구비는 늘어났는데 지향점은 찾을 수가 없다. 연구비가 정치적 이슈를 따라가면 과학에 미래는 없다. 예를 들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이 중요하다는 말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과거에도 수차례 나왔지만 정부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다급해지니 연구비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패스트폴로어 아니겠나. 우리나라가 1등으로 치고 나가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고민을 해서 구체적인 연구개발 계획을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 임시방편으로 흘러가고 있다.

▷임태환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원장=범부처전주기사업단 등 부처 간 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의학·바이오연구에 대한 적극성이 결여됐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 연구 5개년계획 수립에도 의학계는 배제됐다. 이는 최근 코로나19 등 감염병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만시지탄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임 원장=의학 분야에서는 연구 관리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등 부처별로 파편화되어 있어 중복 투자를 피하기도 어렵고 방향성도 상실한 상황이다. 의학·바이오 등 헬스 분야의 연구가 앞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성장동력인 만큼 의학연구 거버넌스의 개혁이 필요하다. 15년 전에 일본은 의료연구개발기구(AMED)를 통해 각 부처가 가지고 있는 연구비를 과감히 통합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 원장=결국 평가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본다. 잘 아는 사람이 전문성을 가지고 연구 과제를 심사해야 한다. 지금의 상피제도를 바꿔야 한다. 공정성을 위해 연구과제에 지원한 대학 소속의 교수는 심사를 못 하게 되어 있는데, 큰 과제의 경우 주요 대학에서 다 지원하기 때문에 결국 연구를 잘하는 교수들은 심사에서 배제되고 비전문가가 심사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권 회장=미래지향적인 연구, 혁신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삼성이 하는 미래기술육성사업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삼성이 2013년부터 10년간 1조5000억원을 출연해 우리나라 미래를 책임질 과학기술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기초과학과 소재,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등에 투자한다. 과거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는데, 이 사업에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돈을 많이 쓴다. 과제 성공률은 낮지만,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한 과정을 잘 정리하면 다음 연구자들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된다. 미래지향적인 연구에 대한 기여를 국가가 해야 한다고 본다.

▷이 회장=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은 인체의 감각 기능을 연구한 사람들이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연구를 한다고 하면 연구비가 1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당시의 시대적 이슈에 부합하는 연구만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 R&D 예산구조도 단년이 대부분이다. 1년 안에 성과를 내고 평가받든지, 길어야 3년이다. 1년을 3년으로, 3년을 5년으로 각각 늘려야 한다. 실수를 용인하는 실수용인제도 필요하다. 세계 최강의 무기 기술 산실인 미국의 국방부 산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성공률은 10%가 안 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평상시에도 그렇고 대선국면에서도 과학은 늘 뒷전이다.

▷이 회장=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근간은 헌법 127조 1항이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급격한 경제·산업 발전이 필요한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경제정책과 산업정책 밑에 과학정책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법도,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감염병 등 지금의 과학이슈는 경제와 산업으로 풀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틀을 과감히 깨버려야 한다. 역으로 과학기술이 경제문제를 해결하게끔 해야 한다. 양극화와 인구문제, 지역문제를 풀 수 있는 진정한 키가 과학기술이다.

▷한 원장=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고 참 부러웠다. 반도체 웨이퍼를 직접 들고나오더라. 세계가 기술 패권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 그게 '과학문화'다. 여태 대한민국이 노벨 과학상을 한 번도 타지 못한 점은 과학기술계 대표로서 진심으로 죄송하다. 하지만 노벨상은 과학 문화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 따라온다. 과학은 국가의 품위이고 기술은 국력이다.

▷권 회장=국가 R&D 관리 체계를 미국의 벤처캐피털(VC)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미션 중심·성과 지향식으로 재편하고, 사업 진행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가이드를 해줘야 한다. 또한 미국은 전략적인 자원 배분을 위해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이 R&D 우선순위를 정한다. 우리나라도 청와대가 중심이 되는 R&D 배분이 필요하다.

▷임 원장=코로나19 등 국가 재난적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 예방에 대한 연구를 평소에도 꾸준히 지원해 국민을 보호할 뿐 아니라 국부를 창출해야 한다. 의학연구원 등 의학·바이오 연구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의사과학자 양성도 거버넌스 통합에서 나온다.

일할 직장이 없는데 누가 의과학자 하겠나…한국도 美처럼 전문연구기관 키워야

―코로나19 사태에서 봤듯이 바이오 산업 육성이 절실하다.

▷임 원장=의사과학자 양성에 답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의사과학자가 안 나오는 것은 의사들이 그 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의사과학자가 나와서 할 일이 없다. 직장을 구할 수 없으니 고사 직전인 것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과학계도 의학을 과학과 분리해 생각하다 보니 의사과학자가 설 곳이 없고, 교수들도 학생들에게 기초의학 연구를 추천하기 어렵다.

▷권 회장=임상의들도 연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한다. 한 시간에 10명씩 환자를 보는데 어떻게 연구를 할 수 있나. 미국의 의사들은 하루에 많이 보면 8명을 진료하고, 나머지는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해준다. 바이오 산업이 커지고 병원 의료수가가 개선되면 병원에 있는 교수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지 않을까.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방안은.

▷한 원장=시장에서 거액의 연봉을 주면 당연히 그쪽으로 인재들이 몰릴 것이다. 의사과학자들도 임상의사처럼 졸업 후 안정적으로 일하고 기여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예컨대 의과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출연연구기관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모든 의학 연구는 NIH(미국국립보건원)가 한다. 하지만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규제기관 역할만 할 뿐 연구 진흥의 역할은 하지 않고 있다.

▷권 회장=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과 고가의 장비 등을 만들어주고 연구비를 줘야 첫 시작이 이뤄지는 것이다. 상당수 한국의 바이오·헬스케어 연구자들이 미국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을 재흡수해야 한다.

▷임 원장= 환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민하고 환자를 살리려는 절실함을 가져본 경험이 없으면 그 절실함 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도 나오기 어렵다. 의사과학자가 갈 곳을 만들어줘야 하고, 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거다.

▷이 회장=현재 기초의학은 의대생을 가르치는 정도에 그쳐 있는 것 같다. 전 세계 주요 의대들은 연구의사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 결국은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몇몇 병원을 지정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정리 =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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