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55> 장 라신의 페드르, 라모의 오페라] 고대 그리스 신화 바탕⋯금지된 사랑과 파멸을 말하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두리번거리다 책장 한쪽에 놓여 있는 한 책에 유독 눈이 간다. 손으로 무심코 책을 꺼내어 한 장 두 장 넘겨본다. 태블릿PC의 차가운 유리를 두드려야 하는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보니 책장을 넘길때 마다 풍겨오는 종이 내음이 무척 마음에 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잡념이 점점 사라져 간다. 책은 곧 필자의 마음과 머리를 완전히 집어 삼켜버렸다. 허리와 목이 뻣뻣하게 굳어 아파올 때쯤 겨우 책에서 헤어나온다. 급히 계산을 마친 후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다시 책을 열어 그 세계에 빠져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책의 세계라기보다는 그 책에서 묘사하는 한 여인의 감정이다. 금지된 사랑에서 무수한 갈등과 고통을 느끼며 파멸되어 가는 한 여인의 감정에 빠져든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채로운 고통을 함께 느끼고, 탄식하고 또 감탄하다가 떨리기까지 했다. 손가락은 연이어 다음 책장을 넘기고 있다.
금지된 사랑과 파멸. 우리 시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내용인 것 같지만, 필자가 읽은 책은 무려 약 350여 년 전에 발간됐다.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극작가 장 라신이 고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페드르’다. 1677년 부르고뉴 극장에서 초연됐다. 프랑스 작가 장 라신이 쓴 페드르는 비극적 희극으로,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 최고의 문학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페드르는 거의 무명이었던 장 라신의 명성을 떨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페드르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배경은 옛 고대 그리스 시대의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트로젠이라는 작은 마을. 이곳에서 아테네 왕비인 페드르는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고통은 너무 컸고 차라리 죽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전쟁에 참전한 남편 테제 왕의 부고를 접하게 된다. 이후 그녀의 유모이자 조언자인 에논이라는 인물의 조언에 용기를 내어 의붓아들에게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그사이에 죽은 줄 알았던 테제 왕은 살아 돌아오고 금지된 사랑을 밝혔다는 사실에 페드르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것을 본 유모 에논은 테제 왕에게 의붓아들이 당신의 아내를 유혹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왕은 분노하여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며 죽음으로 내몬다.
필자가 주목했던 부분은 의붓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선고받았는데도, 페드르가 방관했다는 점이다. 의붓아들 이폴리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돼 분노했기 때문. 하지만 페드르는 의붓아들 이폴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도의 죄책감과 고통에 사로잡혀 결국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고 만다.
장 라신의 페드르는 단순히 스토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인물 심리를 날카롭고 통찰력 있게 묘사한다. 장 라신의 천재적인 필체는 읽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고, 한 여인의 감정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물론 누군가는 비난받아 마땅한 불륜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장 라신은 한 인간이 사랑을 갈망하며 희망을 품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고통에 신음하기까지의 모든 감정을 섬세하고 극적으로 묘사한다. 또 이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책을 읽는 이들의 가슴에 감동을 전한다.
페드르 작품은 17세기 중엽부터 현대까지 많은 이를 열광하게 하고 또 동시대 및 이후 여러 음악가에게 영감을 줬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인 장 필립 라모는 이 페드르를 기초로 ‘이폴리트와 아리시, 1733년 작’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이후 쥘 마스네, 벤저민 브리튼, 한스 베르너 헨체 등 수많은 일류 작곡가가 17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 페드르를 주제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여인의 비극적 사랑에 그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삶을 살며 마주할 수 있는 갈등 및 고통의 표현이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 감정보다도 어쩌면 더 우리 자신을 잘 이해하고 표현해 주는 듯한 장 라신의 인간 심리의 통찰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18세기 프랑스의 작가이자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이 작품을 두고 “인간 감성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며칠 전 필자는 프랑스 극작가 클레멍 카마르 메르시에와 전화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그 또한 현재 프랑스 전역에서 페드르 극에 참여하고 있는지라 우리의 주된 테마는 페드르였다. 대화 중 그가 한 이야기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장 라신이 표현한 페드르의 여성상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 하지만 장 라신이 살았던 17세기는 보수적인 종교와 남성이 주도하던 사회였으니, 21세기 페드르는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물론 필자도 이 말에 공감이 된다. 오늘날 페드르는 고대 그리스 시대, 프랑스 바로크 시대와는 또 다른 사랑, 성관념이 있는 만큼 새롭게 받아질 여지가 충분하다. 페드르가 우리 시대에서는 또 어떻게 우리의 삶과 마주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작곡 장 필립 라모
지휘 마크 민코브스키
장 필립 라모가 50세 때인 1733년 장 라신의 페드르에 영감을 받아 완성한 오페라 작품이다. 현재는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정체성이 원숙미를 통해 표현된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하지만 초연 당시에는 그의 시대를 앞서 나간 화성 진행과 창의적인 표현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고 평가받았다. 당시 음악계 보수층인 륄리의 음악 스타일을 지지하는 ‘륄리스트’와 그와 같은 새 시대의 창의적 표현을 지지하는 ‘라미스트’ 사이에 엄청난 논쟁이 촉발되기도 했다.
이 오페라는 현시대에 들어도 여전히 창의적이다. 파격적인 표현이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섬세함과 서정성이 함께 깃든 프랑스 바로크의 명작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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