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탄생] 무대를 연주자만 만들까? 없으면 큰일나는 사람들
26일 오전 8시 서울 여의도동 KBS 본관에 있는 KBS교향악단 연습실에서 공연지원파트 소속 유재식(56) 단원이 분주하게 의자를 배열하고 있었다. 2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첫 리허설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오케스트라 악기 관리와 무대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유씨는 리허설 때 단원들이 앉을 의자와 보면대, 악기 받침대 등 필요한 소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었다. 연습까지 2시간이나 남았지만 여유가 없었다. 리허설은 사흘 뒤 공연장에서 연주될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으로 시작되는데, 이 곡은 연주자가 80여명에 달하는 3관 편성의 대규모 작품이다. 필요한 의자와 악기 등 준비할 게 많다.
도움을 준답시고 기자가 옆에서 의자 몇 개를 대신 날랐지만 허사였다. 기자가 바닥에 둔 의자는 다시 유씨 손을 거쳐 '있어야 할 자리'로 배치됐다. 유씨는 "얼핏 적당히 간격을 두고 의자를 놓으면 되는 것 같지만, 연주자끼리 간섭도 없어야 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KBS교향악단만의 익숙한 자리 배치를 고수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의자를 두면 단원들이 미묘한 불편함을 느낀다"고 했다.
무대 준비는 상상 이상으로 손이 가는 일이 많았다. 의자 다리 끝에 달린 고무가 닳아서 앉았을 때 흔들리지는 않는지, 연습실 실내 온도는 적정한지 등 사소한 것들이 모두 연주력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이었다. 이 모든 것을 챙기며 유씨는 KBS교향악단에서 21년을 보냈다. 유씨 아버지도 KBS교향악단의 전신인 국립교향악단에서 악기 담당 단원이었다. 부자가 대를 거쳐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악기 담당자의 일은 광범위했다. 더블베이스나 타악기, 하프 등 연주자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오케스트라 공용악기를 보존, 관리하는 것이 1차 업무다. 여기에 더해 공연장 답사를 하며 실제 연주 장소가 어떤 환경인지 파악하고 그곳 사정 맞춰 무대를 준비하는 것도 그의 임무다. 이른바 오케스트라의 온갖 '잡동사니'가 그의 손에서 취급된다. 유씨가 없으면 사실상 공연 준비는 불가능하다. 김원재 공연기획팀 차장은 "해외 오케스트라에서는 악기, 무대 담당이 전문가나 장인으로 대접받는 반면 국내에서는 단순히 몸을 쓰는 직업으로 인식돼서 안타깝다"고 했다.
악기 담당은 이날처럼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통상 오후 7~8시에 공연이 시작되면 10시 전후로 연주회가 끝난다. 공연장에 나간 공용악기를 다시 연습실로 운반하는 것도 유씨의 일이다. 유씨는 "연습실에 악기를 정리하고 퇴근하면 다음날 새벽 1~2시는 돼야 귀가하는 편"이라고 했다. 공연일이 가까워 질수록 스트레스는 심해진다. 유씨는 "공연 당일 공연장에서 빠트린 물건이 생기면 연주를 망치기 때문에 전날 잠드는 순간까지 수없이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목록을 복기하는데, 그러다 보니 거의 잠을 설친다"고 했다. 이렇듯 악기 담당은 관객은 만날 일이 없지만, 지휘자나 연주자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력이다.
유씨의 무대 준비가 끝나갈 무렵 단원들이 하나둘씩 연습실에 도착했다. 코로나19 시대가 되면서 달라진 풍경이 있다. 바로 연습실로 들어가기 전 모든 단원들은 발열체크를 하고, 코로나19 항원 자가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단원들은 연습실 입구에서 15분이면 검사결과가 나오는 키트를 받은 뒤 스스로 검사를 실시,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장했다. 소리가 답답한 불편을 감수하면서 관악기 연주자들 사이에 비말 차단용 아크릴판을 세운 것도 전에는 없었던 모습이다.
오전 10시가 되자 이번 정기연주회 지휘자인 얍 판 츠베덴이 연습실에 등장했다. 평소 치밀한 연습을 주도하는 것으로 유명한 거장이다. 그래서인지 자리를 잡은 단원들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지휘자에게 인사하기 위해 연습실을 방문한 김덕재 KBS교향악단 사장을 비롯해 남철우 사무국장, 손유리 공연기획팀장 등 주요 간부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손 팀장은 "리허설 첫 날은 단원들은 물론 사무국 직원까지 가장 민감한 날"이라고 했다. 다행히 이날 리허설은 큰 문제 없이 순탄하게 시작됐다.
리허설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단원들이 자주 찾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케스트라의 악보 담당자였다. 단원들은 공연지원파트 장동인 대리에게 필요한 악보 요청과 복사 등 다양한 부탁을 해왔다. 장 대리는 "연주를 하다 보면 곡의 흐름상 악보 페이지를 넘기기가 불편하게 인쇄된 것들이 있는데, 단원 요청이 있으면 별지를 만들어서 삽입하는 방식으로 보기 편하게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했다. 지휘자가 지시한 연주법을 악보에 따로 표시해 복사, 배부하는 일도 하고 있다.
악보 담당자는 말 그대로 오케스트라 악보 관리를 총괄하는 사람이다.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 공연에 필요한 악보를 구매, 대여하고 보관하는 일이 기본 업무다. 같은 곡이라도 어느 출판사에서 발행한 악보인지에 따라 연주 방식이 세부적으로 달라지는 만큼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필요한 판본을 정확하게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사용하는 악보가 출판사 등의 저작권을 침해하지는 않는지 법적 문제를 검토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장 대리는 "쉽게 생각하면 특정 악보를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빌린 다음 복사해서 돌려 쓰면 될 것 같지만, 해외에는 그런 불법 사용을 모니터링하는 에이전시가 많다"며 "이미 구매한 악보가 저작권 문제로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도 생겨서 늘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공연 프로그램을 정하는 일은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의 고유 권한이지만, 악보 소장 유무가 곡목 선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장 대리는 "해외 출판사로부터 악보를 대여하거나 구매하는 과정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만큼 1회성 공연을 위해 생소한 곡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습실에서 오전 리허설이 이뤄지는 동안 바깥에서는 지휘자의 점심 식사 준비로 바빴다. 점심시간에 외부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지휘자의 경우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데 선호하는 식단을 마련하는 것도 공연 담당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이날 츠베덴은 특별히 밥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KBS 본관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는 과일가게까지 직접 가서 과일도시락을 주문한 김주희 인턴은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이지만 오케스트라에 대한 인상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성이 느껴지고 보기에도 좋은 메뉴를 고민한다"고 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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