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 문학 개척한 한국 최초 여류소설가

2021. 10. 2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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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문학관 박화성 관. 목포문학관에는 극작가 김우진, 소설가 박화성, 극작가 차범석, 문학평론가 김현 등 4명의 문필가들의 삶과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들어가기 위해 도쿄에 건너가 나흘 간 시험을 보았다. 뇌빈혈이 심했던 탓으로 4일째 시험을 보고 난 뒤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 단계는 면접이었다.
“문학전공을 몇 해나 했나요?”
“이전 학교에서 바로 왔습니다.”
“아냐. 이 글은 분명히 전문가의 글이야. 이걸 분명히 본인이 썼겠지?”
“네”
“흐음. 학교성적에 작문은 만점이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못내 의아해하며 면접에서 시간을 끌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화성의 자전적 작품 <눈보라의 운하>에 나오는 대목이다. 숙명여학교 다닐 때 풍금을 잘 쳐 음악을 전공하면 교비로 일본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택한 영문학을 위해 면접을 보는 과정이다. 수십 명의 중국인, 한국인 등 외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합격했다. 박화성이 입학하기 전까지 이 대학 영문과에는 한국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듬잇돌을 비롯한 박화성의 유품들.

‘목포문학관’의 소설가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은 목포에서 태어났다. 일찍 개화한 가정에서 4세에 한글을 깨쳐 성경을 읽고, 5세에 한자를 배우고, 7세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으며, 집의 소설책을 다 읽은 뒤에는 어머니가 책을 빌려다 주었다고 한다. <옥루몽> <삼국지> <수호지> <사씨남정기> 같은 옛 소설에서부터 <치악산> <추월색> <귀의 성> 등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탐독했다.

그는 신동이라는 소문이 날만큼 뛰어나 월반을 거듭, 11세에 고등과 최고학년인 4학년이 되었다. 서울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여 14세에 모방소설 <식물원>을 썼다. 이듬해 여학교를 마치고 15세의 어린 나이에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해 ‘아기 선생님’이라는 별호가 붙었다고 한다. 1922년 18세에 영광중학교에서 전근했다. 그곳에서 3년여를 머무르면서 시조작가 조운(曺雲)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게 된다. 수필 <정월 초하루>를 읽어본 조운이 소설을 써보라 권하여 <팔삭동>이라는 단편을 썼는데, 그의 첫 창작인 셈이다.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백화>.

박화성은 1925년 단편 <추석전야>가 이광수에 의해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는다. 이광수는 “눈물로써 읽은 작품이다. 기교는 덜 되었고 지은 듯한 데도 있으나 높은 동기, 뜨거운 정서는 비참한 인생의 사실을 보는 듯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 누이들 중에서 이렇게 정성 있고 힘 있는 이를 만나는 것을 심히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호평했다.

동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화성은 우리나라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소설 <백화>를 내놓는다. 이 작품은 1932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청전 이상범 화백의 삽화를 곁들여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수많은 독자들의 찬사와 성원을 받았다. 문학평론가 최일수는 ‘<백화>는 대하적인 흐름과 탁월한 리얼리티와 더불어 우리문학사에 두드러진 업적으로 기록될 만하다’고 했다. 이태준은 ‘작가의 강렬한 문학에의 열을 느낀다. 이 작품을 써나가는 중에 피곤한 붓과 싸웠을 것을 상상한다. <백화>는 문학에의 굳센 동경과 성의에서 맺혀진 한 꽃송이’라고 평했다.

장편소설을 집필한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라고 새긴 문학관 입구의 돌판.

박화성은 <추석전야> 이후 <하수도공사> <비탈> <홍수전후> <고향 없는 사람들> 등의 단편과 <백화> <북국의 여명> 등 장편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가난하고 핍박받는 도시빈민과 농민들의 참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리얼리즘 문학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하수도공사> <비탈> <헐어진 청년회관> <불가사리> 등의 작품에서는 이념적 지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 불법을 자행하는 일본인이나 부당하게 치부한 조선인들에게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독특하면서도 진보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박화성이 활발하게 작품을 썼던 1930년대 소설경향에 대해 평론가들은 동반자적 경향을 특징으로 들고 있다. 김윤식은 “20년대 이미 데뷔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작가로서 뛰어난 역량과 여류로서는 드물게 보는 사상성을 띤 작가”로 주목했다. 백철은 “직접 카프와는 관련 없이 작품을 썼지만 그는 경향파에 속하는 유력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고, 서정자는 “30년대 문학에서 동반자적 경향은 그의 문학의 중요한 특색”이라고 평했다.

1966년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박화성 자택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박화성의 이러한 경향은 오빠 제민(濟民)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오빠를 혈연 이상의 동지의 한 사람으로 여겼다. 오빠가 동경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일 때 그녀는 영광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비를 보내 주었고, 반대로 그녀가 동경에 유학하고 있을 때는 오빠가 돈을 벌어 동생의 학비를 도와줄 만큼 남매의 정은 각별했다.

박화성은 “나는 일체의 사치를 외면하여 머리에서는 기름을, 얼굴에서는 크림과 물분을 제거하고, 옷도 있는 옷으로만 주워 입으면서 학비를 보태주느라 절약에 절약을 하며 살았다. 몸은 비록 가난하나 정서는 언제나 풍요로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사상가였던 오빠는 목포제유공장 파업선동혐의로 구속되어 옥중에서 턱이 썩는 고통을 겪었고, 출옥 후에도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으면서 1942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졌다.

문학관 내부의 집필실.

박화성은 여성작가로서 가난과 육아, 지방작가라는 여러 불리한 여건 속에서 작품을 썼다. <여류작가가 되기까지의 고심담>이라는 글에서 그는 ‘아이들과 억지로 정을 떼 가며, 호랑이 노릇을 해가며, 어머니에게는 불효를 해가며, 도둑놈 도둑질할 구멍 엿보듯이 밤낮으로 조용한 시간만 가져볼 궁리나 머리에 가득하게 가지고 집안일은 밤을 새워 해가면서, 게다가 구설께나 들으면서도 이 붓대를 놓지 못하는 것을 무슨 천형으로 생각’하였다고 쓰고 있다. 또 남편의 옥살이 시중이나 병환 뒷바라지 때문에 제대로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가난한 작가로 살면서 며느리와 어머니와 아내를 겸해야 했던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화성의 동상. 뒤편에 ‘펜 하나로 꿈을 그려낸 세한의 동백이 되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박화성은 섬세하면서 박진감 있는 문장으로, 일제강점기 빈부, 지주와 소작인, 강자와 약자 등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작품들로 호평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서민들의 세대의식과 애정문제 등을 다룬 소설들을 꾸준히 발표해 우리 문단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창작집으로 <백화>(1932), <홍수전후>(1948), <고향 없는 사람들>(1948), <눈보라의 운하>(1964), <휴화산>(1977) 등이 있다. 1966년 한국문학상,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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