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지옥도, 세계 자본주의를 들추다 [박이대승의 소수관점 (5)]

2021. 10. 2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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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이제 〈오징어게임〉은 좀 지겨운 주제가 됐지만,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꽤 남아 있다. 일단 언론 반응에 시선을 돌려보자. 한국언론 다수는 작품 자체보다 ‘한국 문화산업의 대성공’에 주목한다. 어쩌면 한국 관객에게 드라마 속 지옥은 그리 새롭거나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지 모르겠다. 반면 해외 언론에 그 작품은 공포다. 세상 어딘가에 그런 지옥이 존재하고, 그것이 세계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보편적 두려움이 〈오징어게임〉이라는 전 지구적 문화현상의 한 배경이다. 뉴욕타임스, 가디언, 르몽드, 슈피겔 등 영향력 있는 서구언론 대부분이 한국사회의 불평등과 폭력을 조명하는 심층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한국 관객의 입장은 좀 난처하다. 한국사회의 지옥도를 재현한 작품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넥플릭스 제공


드라마, 한국, 자본주의

〈오징어게임〉의 성공 원인 중 하나는 드라마와 현실이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다. 이 작품은 생각 이상으로 독창적이다. 미지의 권력자가 평범한 이들을 고립된 장소에 가두어 죽음의 게임을 시작한다는 발상은 익숙하지만, 기존 작품 대부분은 판타지 형식을 택한다. 반면 〈오징어게임〉의 폭력은 극단적이지만 충분히 현실적이고, 호러 판타지보다 범죄물에 가깝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게임 진행자들이 가면을 벗는 순간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게임 참가자와 똑같은 인간이다. 피가 튀고 내장이 잘려나가는 폭력은 초월적 존재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얼굴을 가진 현실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반(反)판타지는 한국 대중문화를 특징짓는 경향 중 하나다. 할리우드와 일본의 창작자들은 사회적 폭력을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다른 우주나 먼 미래로 간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폭력의 진짜 모습은 은폐되게 마련이며,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적 픽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창작자는 오히려 역사적 현실에 집중할 때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조한다. 멸망한 지구를 달리는 기차의 꼬리칸(〈설국열차〉)보다 서울의 반지하 주택(〈기생충〉)이 불평등의 실재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의 역사와 현재가 폭력의 작동방식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때문에 굳이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려올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오징어게임〉이 한국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 이유도 같은 맥락에 있을 것이다. 한국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이 말은 한국 자본주의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사회만이 투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메커니즘이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논리를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회는 찾기 힘들다. 아주 먼 훗날의 인간이 21세기 자본주의를 알고 싶다면, 특히 어떻게 인간이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한국 역사를 읽으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오징어게임〉은 한국사회의 알레고리이고, 한국사회는 그 자체가 세계 자본주의의 알레고리(혹은 환유)다. 이런 식으로 ‘헬조선’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직시하는 세계인의 언어가 돼간다.

자본주의와 폭력을 잇는 고리 ‘빚’

해외 언론이 〈오징어게임〉을 다루며 특히 주목하는 부채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기훈과 상우는 단지 가난해서 게임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동기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빚더미에서 해방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게임의 설계자가 승리자에게 약속한 것은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이고, 참가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타인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이 인간을 극단적인 폭력으로 몰아넣고, 평범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

‘가난’과 ‘빚진 상태’는 연속적이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폭력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빈곤 국가에서 벌어진 비극의 상당수는 가난이 아니라 서구 국가·자본과 부채 관계로 얽혀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당장 한국만 봐도 IMF 사태 이후의 사회적 폭력은 국가의 빈곤이 아니라 부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인 부채시스템이고 금융 자본은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행사한다. 부채의 유무와 빈부격차는 다르다. 부자도 빚을 질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빚을 져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 ‘부자’는 단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더 큰 규모의 부채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빈부격차가 아니라 빚으로 더 큰 돈을 버는 사람과 빚더미에 깔린 사람의 불평등 아닌가?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 시작되는 순간은 자본가가 무산자를 착취할 때가 아니라 금융 자본이 무산자에게 돈을 빌려줄 때인지도 모른다. ‘착취’와 ‘이자’의 차이는 노동자와 노예의 차이만큼 크다.

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한국사회다. 양극화된 노동시장, 높은 자영업자 비율,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 ‘선진국’ 수준의 국내총생산(GDP), 금융 소득에 대한 열광 등은 대출과 투자를 평범한 일상으로 만들었다. 어딜 가나 대출 광고가 넘치고, 인터넷에는 빚에 관한 경험담이 가득하다. 대중의 분노와 관심은 부자와 빈자의 불평등보다 부동산, 주식, 코인으로 ‘대박 난 사람’과 ‘빚더미에 앉은 사람’의 격차에 집중된다. 여기서 망하면 0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오징어게임〉의 기훈처럼 망하는 과정마다 부채가 개입한다. 구조조정 당한 후 대출받아 자영업을 시작하고, 자영업 실패 후에는 빚으로 빚을 돌려막는 삶이 시작된다. 자본은 실패자를 무기력하게 놔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았다면 기꺼이 돈을 빌려줘 경제시스템 안으로 데려온다. 대출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포획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금융 자본주의는 보통 사람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 난해한 체계로 묘사되곤 한다. 그것은 마치 월스트리트의 수학자가 만들어낸 통계 함수의 비밀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의 본성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냥 드라마에 묘사된 한국 자영업자의 처지를 보면 된다.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 이것이 자본주의가 부채를 통해 재생산하는 사회적 존재의 모습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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