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예술가의 캔버스가 되다 [거리예술의 세계 (1)]

2021. 10. 2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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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1980년대에 이르러 뉴욕의 지하철과 모퉁이를 색채로 물들이던 그라피티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지만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의 거리예술가들이 대중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의 ‘킬로이 여기 있었다(Kilroy was here)’ / 위키피디아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은 자신의 에너지와 창조력이 예술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시작한 일종의 그림문자였다. 1960~1970년대 어디선가 미국 뉴욕의 젊은이들은 에너지 분출 방법으로 길거리와 지하철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뉴욕 전체를 돌아다니는 지하철과 후미진 거리의 건물 벽은 이들에게 훌륭한 캔버스가 돼줬다. 도시 전체를 활보하던 거리의 게릴라 예술가들은 익명성에 숨은 거리예술의 창시자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 에어로졸 스프레이 캔의 발명으로 촉발된 그라피티는 뉴욕시 할렘 지역에서 하위문화의 상징으로 스스로 꽃피우고 성숙했다. 초기 그라피티 아티스트는 일반적으로 ‘작가’ 또는 ‘태거(가능한 한 많은 곳에 태그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간단한 태그 또는 양식화된 서명을 쓰는 사람)’라고 불렸다. 지하철은 먼 거리를 이동했기에 많은 사람에게 작가의 이름을 노출하는 데 있어 매우 적합한 매체였다. 사회학자 리처드 라흐만(Richard Lachmann)은 움직이는 지하철 차량의 그라피티에서 거대한 예술작품의 에너지와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며, 그라피티가 독특하고 역동적인 예술형식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움직임, 동작성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임에 주목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뉴욕의 지하철과 모퉁이를 색채로 물들이던 그라피티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지만, 기존의 미술계가 거리예술을 전시하기 시작하면서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의 거리예술가들이 대중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거리예술이 자본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미술시장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힙합이 젊은이들의 문화에 전면적으로 나서면서 대중문화에서 그라피티는 없어서는 안 될 자리를 획득했다.

기법 또한 스프레이 캔에서 스텐실, 스티커, 타일, 프로젝션 맵핑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조형예술의 한 분야로 받아들여졌다. 거리예술(Street Art), 혹은 어반아트(Urban Art)라는 이름으로 영역과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그 응집된 에너지를 분출했다.

루도의 그라피티 / streetartnews.net


거리, 대중에게 돌아오다

1960~1970년대 불안한 젊은이들의 저항에서 시작된 그라피티는 행위예술, 설치예술을 거리예술로 끌어들임으로써 대중에게 무관심한 거리를 예술에 돌려주는 중심축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라피티가 출발하던 시기에 자신들만의 언어로 공간을 파괴하고 점유하려던 의도였을지라도 지금 그라피티는 거리예술이라는 확장자로 자신들의 유머로 대중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며 대중의 지지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라피티’라는 용어는 ‘긁거나, 그리거나, 쓰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graphein’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라피티는 문자를 조합하고 스타일을 창조하는 예술이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그라피티를 알고 있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발견된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는 인간이 자신의 염원을 새겨놓은 최초의 그라피티다. 자신의 아이디를 마킹(Marking)해 계속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한 그라피티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근원을 같이하기 때문에 선사시대에 그 기원을 눠도 무방할 것이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멕시코 벽화 시대를 지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뜬금없는 글귀가 전쟁터 이곳저곳에 나타난다. “킬로이 여기 있었다”라는 이 유명한 문구는 누군가의 낙서가 군인들 간 연결의 모티브로 결속력을 다지며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러면서 이 가장 유명한 낙서는 전쟁이 끝난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 심지어 에베레스트에도 등장한다. 누구라도 킬로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킬로이가 아닌 이 낙서는 그라피티의 익명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태그로 알린다는 측면에서 그라피티의 동기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스라엘의 아스켈론에 그려진 한국 거리예술가 로얄독 (본명: 심찬양)의 작품 / www.royyaldog.com


그라피티는 자발적이고 역동적이다. 최초의 거리예술로서의 그라피티는 정부나 기관이 주도한 마을 환경정비나 기업의 광고목적의 컬래버 거리예술과는 거리를 둔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로 어디서든 그릴 수 있고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행위였다.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초기매체는 분필이었다. 이후 사용하기 쉽고 작업 시간이 짧은 마커를 선택했지만, 곧바로 더 손쉽고 빨리 너른 공간을 장악할 수 있는 스프레이 캔으로 옮겨갔다. 특히 선을 선명하게 잘 그을 수 있었던 이 에어로졸 스프레이는 거리예술이 크고 다채롭고 정교하며 다양한 효과를 내는 데 지대하게 기여한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스프레이 페인트 캔은 다양한 시각적 효과와 선, 면 등을 쉽고 빠르게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초기의 조잡했던 태그의 크기와 규모를 지하철 차량 전체를 감쌀 만큼 키웠고, 더 빨라졌으며,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작업에서 이미지를 포함하는 작업으로 작업의 형식적 변화가 일어났다. 스프레이 캔이 독창적인 예술형식을 만들어내는 트리거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라피티, 거리예술로의 확장

거리예술은 기법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기 시작했는데 스텐실과 밀포스터, 프로젝션 맵핑과 증강현실기술을 이용해 거리에 가상의 조형물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스텐실(스텐실 그라피티라고도 함)은 일반적으로 종이나 판지로 된 그림의 틀을 미리 준비하고 설치 장소에 테이프로 벽에 부착한 다음 스프레이로 칠해 이미지나 텍스트를 남기는 기법이다. 이미지나 텍스트를 몇초 만에 매우 쉽게 만들 수 있고, 당국과의 충돌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어 뱅크시(Banksy)와 닉 워커(Nick Walker), 프랑스의 어니스트 피뇽 어니스트(Ernest Pignon-Ernest) 같은 예술가들이 이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밀 페이스트는 밀가루나 전분을 물과 섞어 만든 접착제로 종이 포스터나 인쇄물을 벽에 붙일 때 사용한다. 스텐실처럼 밀 페이스트 포스터도 짧은 시간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어 거리예술가들이 선호하는 기법이다. 대부분의 거리예술이 불법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신속성은 작품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체포되지 않기 위한 중요한 요건이다. 이런 이유로 거리예술에 패스트 아트(fast art)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뱅크시의 그라피티 / etartutopia.com


밀 페이스트 방식을 사용하는 거리예술가로는 이탈리아 듀오 스텐(Sten)과 렉스(Lex), 프랑스 예술가 제이알(JR)과 루도(Ludo), 미국 예술가 스운(Swoon)이 있다.

2010년 전후로 거리예술은 이전보다 한층 자유롭게 도시를 갤러리로 만들었다. 일부 거리예술가들이 3차원 조각과 설치, 프로젝션 맵핑, 증강현실기술까지 작품에 적용하면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들이 미술계의 주인공으로 부각하며 대형 글로벌 브랜드나 기관과 협업이 잦아졌고, 더 이상 불법이라는 꼬리표 없이 자유롭게 그들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들로 인해 자유를 표방하던 거리예술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장의 논리에 젖어 들어 자유로운 표현과 정신이 훼손됐다는 우려의 시선도 분명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과정은 어느 예술에서나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거리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자본이 공급되고, 이들의 다채로운 실험이 시든 도시에 다시 활기를 찾아준다면 거리예술가들의 활약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 여기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허지영 아테니빌 아트디렉터 장인선 아트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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