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와 환자의 관계 [메디칼럼 (6)]

2021. 10. 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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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TV 예능프로그램 중에 〈스펀지〉라는 방송이 있었다. 주로 제보자가 신기한 사실이나 자연현상을 제보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빈칸 안에 들어갈 내용을 맞히게 하고, 정답이 나오면 전문가가 나와 “네. 사실입니다” 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나는 왜 전문가들은 신기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보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일반인 제보자가 재미나고 희귀한 사실을 제보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네. 사실입니다” 하는 모습이 약간 얄밉기도 하고, 전문가도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 나오는 전문가 대부분은 알고 있었겠지만 그게 신기한지 잘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것이고, 설령 모르는 경우에도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이를 사후과잉확신편향(Hindsight Bias)이라 하는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알기가 참 힘들다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에 해당한다. 정말 그럴 줄 알았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주식과 같다. 어떤 주식 종목이 오르거나 떨어지면 그 종목이 왜 올랐는지 아니면 떨어졌는지 분석하는 건 너무 쉽다. 하지만 내일 그 종목이 계속 오를 건지, 아니면 떨어질 건지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의학의 영역도 그런 부분이 많다.

의사들의 ‘사후확신편향’

우리 병원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간질환 명의 노교수님이 한분 계시는데, 얼마 전에 교수님께서 겪은 환자의 일화도 그런 예다. 간경화 환자의 경우 ‘간성혼수’라는 상태로 응급실에 오는 경우가 많다. 간성혼수는 의식이나 행동 등에 신경학적 변화를 겪는 질환으로 정확한 발생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으나 혈중 암모니아 수치 상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번 응급실에 간성혼수로 왔던 환자가 또 혼수상태로 응급실에 오게 된 것이다. 당연히 간성혼수라고 판단해 그에 따른 치료를 했으나, 환자의 의식상태가 개선되지 않아 머리 CT를 찍어보니 뇌출혈이 있다는 것이 뒤늦게 진단됐다. 그러자 평소에 잘 보지 못했던 환자의 친척이 교수님께 와서 사람이 의식이 없어져 응급실에 왔다면, 당연히 뇌 손상부터 생각해 그것부터 조사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할 말이 없으셨다고 했다.

나 자신도 외과 전공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느끼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담당하는 환자가 결국 돌아가셨을 때다. 그 환자를 치료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수술 전에 아무리 그 환자가 위중하고 결국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해 그에 맞게 치료하고 또 의료과실이라고 판단될 만큼의 잘못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뒤돌아보면 ‘여기서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저때에는 저렇게 하면 안 됐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의학의 경우,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딱 맞아 떨어지는 결과보다 애매하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사후확신편향이 더 쉽게 일어난다. 더구나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실에서 실험하듯이 조건을 통제할 수도 없고, 이런 경우에는 이런 질환이라 이런 치료를 해야 한다는 공식이 10번 들어맞다가도 한명의 예외만 나와도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또 만성질환을 보는 의사들은 장시간의 치료를 하면서 서로 동반자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반면 외과의사의 경우 의사·환자가 관계가 다소 급격하게 형성되며 비대칭적이다. 갑자기 큰 병을 진단받고 전신마취를 한 상태에서 자신의 배를 열고 장기를 만져야 하는 의사에게 환자들은 일방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큰 신뢰가 필요한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관계가 결과가 좋을 때는 참 훈훈하겠지만, 수술 후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파국으로 가기도 한다.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큰 신뢰를 한 만큼이나 큰 실망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의료소송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의료소송이 일어나는 경우는 실제로 의사의 과실이 있을 때보다 의사·환자의 관계가 망가졌을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안 좋을 때도 환자 옆에 붙어 있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환자나 보호자와 지속적으로 소통을 한다면 소송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외과의사 중 대부분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환자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책임감과 자괴감, 죄책감 등 복잡한 감정 때문에 자신이 수술한 환자를 떠나지 못한다.

환자는 의사의 ‘최선’을 느낀다

최근에 당뇨로 고생하는 분에게 뇌사자의 췌장을 적출해 췌장 이식 수술을 했다. 그 환자분은 이전에 나에게 신장이식도 받은 분인데, 신장이식 이후에 요관과 방광을 문합한 부분이 아물지 않아 여러 번 수술하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한 분이라 췌장 이식 수술은 아무 문제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했다. 췌장 이식 수술 자체는 잘 돼 수술 직후부터 혈당도 인슐린 투여 없이 완전히 정상화 됐고, 수술 부위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주 작은 뇌혈관이 막혀 뇌졸중이 발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말투가 약간 어눌해지고, 글씨를 쓰려면 오른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정도였다. 특별한 시술 없이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회복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환자와 보호자에게 찾아가 수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술 중에 급격한 혈압변화 등 이러한 요인으로 뇌졸중이 발생한 것 같다고 유감의 뜻을 표하니, 오히려 환자와 보호자가 췌장 이식과 관련이 있는 합병증은 아닌 것 같고, 단지 운이 좀 안 좋았던 것 같다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환자와 보호자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외과의사의 삶이라는 것이 고달프고 외롭고 힘든 순간이 많다. 계획한 수술이 생각대로 돼 짜릿한 기쁨을 느끼다가도 그 환자가 조금만 안 좋아지면 금방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다시 회복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증에 걸려 술에 취하곤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희로애락을 느끼며 누구보다 진하게 살 때가 많다. 생명을 다루는 외과의사의 가장 큰 보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치열하고 진하게, 때로는 징그러울 만큼 ‘삶’을 느끼며 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환자나 보호자에게 전해진다면 마치 전쟁터에서 전우와 같은 유대감이 서로에게 생기는 듯하다.

최병현 양산부산대병원 간담췌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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