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위한 기본재 [오십, 길을 묻다 (53)]

2021. 10. 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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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그의 아들인 철학자 에드워드 스키델스키의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2012)가 좋은 삶의 내용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것들을 ‘기본재’라고 부른다.

노동자들이 근로시간을 줄이지 못하는 것은 소득분배 악화로 실질임금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13일, 서울 구로구 지하철 신도림역에서 출근길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이동하고 있다./권도현 기자


하나하나 삶에서 소중한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할까. 이런 기본재를 누리기 위해선 일단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많이 벌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우리는 경제성장이 우선이라고, 기본재는 잘살고 난 다음 따지자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저자들은 이 기본재를 ‘잔여 범주’로 보지 않는다.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취업 후에는 성공을 위해 일하고, 풍족한 노후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게 중요한데, 거기에 덧붙여 이런 것도 있으면 좋겠다는 범주가 아니라는 거다. 더 이상 빈곤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라면 GDP(국내총생산)로 표현되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이런 기본재가 삶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거다.

‘오십, 길을 묻다’라는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엔 좋은 삶을 이루는 게 무엇일까에 대해 저자들만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런 기본재에 문제가 생기거나 결핍됐을 때, 뒤늦게 그 소중함을 깨달았다. 좋은 삶이란 어떤 건지를 따지기 전 좋은 삶의 기준이 새로운 억압이 아닐지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 적도 있었다.

끝없는 욕구, 줄지 않는 노동

저자들이 좋은 삶을 강조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이 삶을 고역으로 만드는 ‘끝없는 욕구’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결핍을 찾아내는 존재다. 자본주의는 이런 특성을 문명 전체의 심리적 토대로 만들어 버렸다. 저자들은 부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좋음’이라는 객관적 개념으로 통제하자고 제안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망에 대한 비판은 흥미로운 출발이다. 1930년 케인스는 기술이 진보하면 시간당 생산량이 증가하므로 필요 노동시간이 점점 줄어 일할 필요가 거의 없어지는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100년 후인 2030년쯤이면 인간은 경제적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건지, 여가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같은 진정하고도 영원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고 봤다.

하지만 케인스의 예측은 빗나갔다. 선진국의 경우 1930년대에 비해 4~5배 이상 부유해졌지만, 평균 노동시간은 15%만 줄어들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평균값의 문제다. 소득분배에서 불평등이 커지면 소수는 엄청나게 돈을 벌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균보다 적게 번다. 또 평균 노동시간은 국가별 노동문화에 영향을 받는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저임금 노동자는 원하는 시간보다 적게 일하고 고소득 노동자는 필요 이상 긴 시간을 일한다.

노동시간은 좋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일부 직업에선 일의 즐거움과 여가의 두려움으로 노동시간이 늘었지만 대부분 국가에서 사람들은 더 적게 일하기를 원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줄이지 못하는 것은 소득분배 악화로 실질임금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예측은 물질적 욕구가 언젠가는 충족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갖는데, 이 전제가 끝없는 욕구와 상대적 필요의 창출에 직면하면 무력해진다.

인간이 늘 이랬던 건 아니다. 술이 흐르고 물고기가 절로 구워져 식탁에 오르는 고대적 환상같이 게으름과 안락을 갈망하는 개인적 유토피아도 있었고, 공적 삶의 가치를 중시한 고대 철학자들의 공민적 유토피아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이 좋은 삶에 있다고 봤다. 좋은 삶이 실재하며 화폐는 그 수단에 불과하다는 가정이 세계의 위대한 문명에서 공유됐다.

현재 우리가 일과 소비에 중독된 것은 좋은 삶이라는 이념에 대한 공적 논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21세기 현재 좋은 삶이란 과연 어떤 것들로 채워질 수 있을까.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가 좋은 삶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은 앞서 말한 다음과 같은 기본재들이다.

‘좋은 삶’을 채우는 요소들

부키
첫째, 건강은 의학적 치료의 대상을 넘어 신체가 온전히 기능하는 것이다. 건강은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기에 가장 앞자리에 놓일 만하다. 둘째, 안전은 자신의 삶이 지속될 거라는 개인의 기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 안전은 자본주의 시장이 끊임없이 강요하는 변화에 의해 위협받는다. 셋째, 존중은 누군가의 견해와 관심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불평등이 지나친 사회에서 이 존중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넷째, 개성은 자신의 취향, 기질, 좋음의 개념을 반영해 삶을 계획하고 실행할 능력이다. 사유재산은 개성의 핵심적 보호막이지만, 재산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그렇지 않은 다수의 개성이 위협받는다. 다섯째, 자연과의 조화는 우리 자신을 위해 녹색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섯째, 우정은 단단하고 다정한 관계의 전체를 포괄한다.

마지막으로 여가는 삶을 고역으로 만드는 끝없는 욕망에 맞선다. 여가는 휴식이 아니다. 그 자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행하는 의미 있는 행위다. 유급노동까지도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여가가 될 수 있다. 여가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참되게 바라볼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여기’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따라서 이 기본재들이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좋은 삶이라는 윤리적 요청이 그렇게 힘이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먹고살려면 돈이 들어가야 하고, 먹고사는 게 아니더라도 돈이 들어갈 데는 많고, 소득 빼고 다 오르는 것 같은데 요즘 집값은 어쩌면 저렇게 오르는지.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삶이 그렇게 달라질지 확신은 없다.

그런데 좋은 삶을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로 구체화해 놓으니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십을 넘어보니 소중하더라고 한가하게 말할 일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은 삶의 구성요소 하나하나 후회가 안 되는 게 없다.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가꿨어야 했고, 지금이라도 가꿔야 하는 것들이다.

부유한 삶과 좋은 삶. 두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행복한 삶일 거다. 둘 가운데 하나를 먼저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정직하게 어떤 삶을 골라야 할까. 그래도 좋은 삶이 부유한 삶보다 여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바라보니, 아직도 정신을 덜 차린 사춘기일까. 오십이 넘어도 삶은 여전히 내게 어려운 과제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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