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적 정책' 쓰지 않았다

정용석 단국대 명예교수 2021. 10. 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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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후보가 된 후인 지난 15일 “루스벨트는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공산주의적·사회주의적 강력한 정책을 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미국 32대(1933~1945)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는 절대 ‘공산주의적 정책’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극소수 미국인이 당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고 성토한 데 불과했다. 이재명 후보는 일부 과장된 외마디 소리를 ‘공산주의적·사회주의적 정책’ 집행으로 착각한 듯하다.

1933년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미국 경제 정책은 고전적 경제학파의 자유방임에 기초했다. 애덤 스미스의 1776년 ‘국부론’에 영향받은 자유방임은 정부의 간섭이 경제 흐름을 꺾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부 개입 없이 그대로 두면 침체에서 회복으로 균형을 스스로 취한다고 했다. 대공황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실업률이 25% 최악 상태로 치닫는데도 경제가 스스로 회복될 것이라며 손 놓고 기다릴 따름이었다.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깡통에 담아 굶주린 시민에게 나눠주라는 주문 정도였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한 대공황 극복에 뛰어들었다. 그는 1933년 3월 4일 취임사에서 의회가 전시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비상 대권을 위임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그는 5일 금의 유통을 금지했으며 6일엔 4일간 은행 영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민주당 소속 루스벨트의 ‘뉴 딜’은 2단계로 나뉜다. 1단계(1933~1934년)에선 기업인·노동자·농민·예술인·종교인 등 모든 계층을 망라한 ‘진정한 제휴’로 갔다. 기업에는 독점금지법을 잠정 중단시켜 주었고 기업끼리 과도한 경쟁보다는 서로 생산 품목을 배분하고 가격을 정할 수 있도록 했다. 노동자에게는 기본 생활급을 지급해주며 어린이 노동을 폐지했다. 노조 결성권과 집단적 노사협상권도 부여했다. 농민에게는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폭락 방지를 위해 곡물 재배를 제한하고 담배·면화·옥수수 등을 갈아엎게 했으며 현찰로 보상해 주었다. 예술인·문인·종교인들에게도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뉴 딜’ 2단계(1935년 이후)에서는 복지국가 기초를 세웠으며 재정 적자를 통한 경기부양책으로 들어갔다. 사회보장법을 통한 연금제와 노년 불안 해소를 위한 노년사회보장제 등을 제도화했다. 재정 적자를 통한 경기부양책은 존 케인스의 수정자본주의 이론에 기반했다. 케인스는 경기 침체 시기에 임금이 깎이면 총수요와 고용을 위축시켜 경기를 둔화시킨다고 했다. 정부가 공공 사업을 늘려 유효 수요를 창출해야 주저앉은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케인스의 유효 수요 창출 이론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모든 자유시장경제 국가들에서 채택되고 있다. 루스벨트의 ‘뉴 딜 정책’은 사유재산권을 말살하고 평등 배분으로 간 ‘공산주의적 정책’이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단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비상 대권을 발휘, 기업·노동·사회 제휴를 끌어냈고 권력 개입에 의한 유효 수요 창출로 갔을 따름이다. ‘공산주의적’이 아니라 자유시장경제 경쟁 틀 속에서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과감한 ‘진보적 개혁’을 펼쳤을 따름이었다. 그 후 미국은 공화당이나 민주당 모두 루스벨트의 ‘뉴 딜 정책’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미국을 ‘공산주의적’ 국가로 보지 않는다. 정치권은 자기들의 좌파 노선 합리화를 위해 루스벨트를 함부로 ‘공산주의적 정책’이라고 원용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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