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前대통령 별세] 북방외교로 경제 초고속 성장.. 군사쿠데타 주도는 과오로 남아

김미경 2021. 10. 26.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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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중국과 외교관계 수립
임기중 연평균 8.5% 고성장
퇴임후 비자금 혐의로 구속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26일 향년 89세로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6·10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직선제로 선출된 제13대 대통령이다. 전국을 휩쓴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유혈 충돌 없이 6공화국을 세웠고, 북방외교와 금융시장 개방 등 다양한 개방 전략을 통해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이면에는 전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는 멍에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 신용리(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를 졸업하고 육사 11기로 군에 들어가 동기생 '전두환'을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쿠데타 당시 9사단장으로서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키는 등 군사반란에 가담했다. 전 전 대통령의 5공화국 정권이 출범한 뒤에는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전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후계자의 길을 걸었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위원 등 이인자로 7년을 보냈다. 노 전 대통령이 두각을 보인 것은 1987년 민정당 대표위원으로서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격 수용한 6·29 선언을 하면서부터다.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로 치른 1987년 대선에서 '보통사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을 대표하는 정책은 '북방외교'와 '개방화'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1980~1990년대는 소련 붕괴 등 공산권 사회의 격변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개최한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하고 그동안 우리나라와 전혀 수교가 없던 사회주의 국가들과 하나씩 수교를 맺어나갔다. 1989년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1990년 당시 소련 등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특히 중국과의 수교를 맺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 유엔 동시가입 등 대북관계의 근간을 구축한 점은 치적으로 꼽힌다.

원래 북방외교는 박정희 정부 때 처음 등장했으나 북한을 제외한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를 한정적으로 의미했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노태우 정부부터 활발한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노 전 대통령을 대표하는 외교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노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도 긍정적인 평가를 낳고 있다. 1988년 12월 5일 외환 및 금리자유화를 시행해 금융기관의 금리에 대한 직접규제를 철폐했다. 무엇보다 서울올림픽 특수를 톡톡히 누리면서 연평균 8.5%라는 경제 고속성장을 이뤘다. 1986년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뒤 1988년에는 수출 600억 달러를 돌파했다. 1989년에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국가적 위상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성과는 12·12쿠데타와 5·18 유혈진압 책임론, 수천억원 상당의 비자금 조성 등으로 빛이 바랬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임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비자금 2628억원 조성, 12·12쿠데다와 5·17 내란 혐의 등으로 유죄가 확정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 신세를 졌다. 1997년 김영삼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다.

5·18과 관련해서는 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재헌씨가 사과를 하긴 했으나 끝내 직접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지는 않고 떠났다.

5·18 민주유공자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은 이날 공동성명을 내고 "노씨는 4공화국 당시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5·18 당시 광주 시민 학살에 동참했다"면서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통령이 된 노씨는 1988년 5·18항쟁을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면서도 계엄군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시민과 군·경이 충돌,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이라며 책임의 본질을 흐리려 했다. 회고록에도 사과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김미경기자 the13oo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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