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할매 입맛' 유행이 말해주는 것
최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업체가 고령층 대상 유동식을 출시했는데 의외로 매출의 절반 이상이 젊은 세대에게서 발생했다. 그러자 경쟁업체는 아예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흑임자 유동식을 출시하면서 "젊은 세대가 '할매 입맛' 식품에 열광하고 있어 관련 제품을 출시하게 됐다"고 했다. 첨단 디지털 시대에 젊은이들이 할매 입맛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신 트렌드가 반영되는 카페 음식 시장에서까지 작년부터 이런 현상이 이어졌다. 커피 프랜차이즈들이 흑임자 메뉴를 경쟁적으로 출시했고, 이 흐름이 쑥과 인절미로도 이어지더니 △쌀 △현미 △흑미 △약콩 △분태 △백태 △팥 △율무 등 곡물들을 첨가한 라떼 파우더까지 나왔다. 보통 카페 음식하면 자극적이고 현대적인 맛이 떠오르는데 그 상식이 깨진 것이다.
프랜차이즈 측은 소셜미디어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음식을 선호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편의점, 빙과업계, 제과업계 등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흑임자, 인절미, 미숫가루 등이 신메뉴로 등장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 '할매니얼' 트렌드가 있다. 할매니얼이란 할머니와 '밀레니얼'(1982~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을 합친 단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좋아할 것 같은 입맛을 가진 밀레니얼 세대라는 뜻이다.
이는 뉴트로 열풍에서 이어진 현상이다. 뉴트로는 새로움(New)와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기존 복고는 기성세대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었는데, 뉴트로는 젊은 세대가 과거 문화를 새롭게 즐기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과거의 것들을 신선한 새 문화로 받아들인다. 바로 그래서 을지로 옛 골목이 핫한 '힙지로'로 뜨고, 옛날식 다방 스타일이나 '○○당(堂), ○○옥(屋), ○○상회(商會)'와 같은 옛날식 이름이 떴다. 편의점 업계 관계자는 "2030 젊은 세대가 레트로 아이템에 열광하고 있다. 할매니얼 현상도 힙지로와 같은 뉴트로 트렌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디지털 첨단문명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질주한다. 증강현실,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일일이 따라잡기가 벅찰 정도다. 이럴수록 피로감이 커지고 휴식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디지털이 강력해질수록 아날로그가 뜬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는 것도 할매니얼의 배경이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2008년에 처음 기획했을 땐 죽고 죽이는 경쟁 설정이 공감을 못 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에 이르러서 공감을 받아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럴 정도로 점점 더 경쟁이 극심해진다. 젊은 세대는 몇 년간 부동산 투기, 가상화폐 투기 등 재테크에 골몰했지만 '사다리가 이미 부러진' 현실만 실감했을 뿐이다. 모두가 '오징어 게임'의 말과 같은 신세라는 인식이 생겼다.
이렇게 각박할수록 사람은 따뜻한 품을 그리워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품. 그것이 바로 할머니다. 옛 입맛을 다시 찾는 것이면 할아버지 입맛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할매 입맛'이라고 하는 것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조금 더 친밀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으로도 할아버지-아버지 계열은 사회의 엄격한 질서를 상징한다. 반면에 할머니-엄마 계열은 그런 질서에 적응하느라 지친 나를 다독여주는 품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요즘 입시 트레이너의 느낌이 강해져서 할머니가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런 품에 기대고 싶은 심정이 할매니얼로 나타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자극적이고 강한 맛이 유행했는데 그것도 각박한 세상의 영향이었다. 불안하고 피폐해진 상황에서 강한 자극으로나마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극적인 맛의 유행과 할매 입맛의 유행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영상물 시장에서도 '오징어 게임' 같은 자극적인 콘텐츠와 '갯마을 차차차' 같은 힐링 콘텐츠가 동시에 인기를 끈다.
서구에서도 할매니얼 현상이 나타났다. 할머니 스타일을 추종하는 밀레니얼 세대라는 뜻으로 '그래니 시크(granny chic·세련된 할머니)', '그랜드밀레니얼(grandmillennial)'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양극화가 만성화되면서 젊은 세대의 불안과 박탈감이 커졌는데, 그럴수록 따뜻한 위로를 그리워하게 됐다.
요즘 세대는 재미를 추구하는데 옛날식 코드가 개성적이고 신선한 재미로 받아들여진 측면도 있다. 세상이 각박하기 때문에 위안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뉴트로 복고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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