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前대통령 타계] 12·12사태 주동·마지막 軍출신 대통령..6·29선언으로 직선제 도입

이지용 2021. 10. 2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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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누구인가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12·12사태로 권력 2위 올라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
후계자로 김영삼 지목하며
문민대통령 시대 개막 일조
퇴임 이후엔 불운한 말년
비자금 조성으로 실형 선고
장남 노재헌씨 광주 찾아 사과

◆ 노태우 前대통령 타계 ◆

마지막 군인 출신 대통령이었던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기록됐다. 그를 통해 소위 '87년 체제'가 구축됐으며 그가 단행한 '3당 합당'을 통해 오늘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양당 구도가 형성됐다. 그 스스로는 군사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문민 대통령 시대를 여는 가교 역할도 담당했다. 반면 '광주학살' '수천 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은 그의 인생에 오점으로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모범생으로 성장해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지냈다. 아버지 노병수 씨가 사망한 것은 그가 7세 때인 1939년이었다. 시련 와중에도 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인 데다 친구를 화해시키는 데 능해 황희정승의 이름을 딴 '노정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946년 달성에 있는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10대 1 경쟁률을 뚫고 경북중학교 편입에 성공했다. 당시 동문들은 그를 과묵하고 착실한 모범생이며 대인 관계가 원만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1950년 6·25전쟁은 그가 군대와 첫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피란을 갔다가 학도병으로 징집돼 복무하던 중 대구에 있는 헌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듬해인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정식 입학하면서 전두환, 정호용 등 하나회 핵심 멤버를 만났다. 육사생도 시절 그는 운동에 능해 육상부와 럭비부원으로 활약했으며, 헤르만 헤세의 소설과 홍사용 시인의 시집을 즐겨 읽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의 군생활은 야전에서 작전·행정까지 두루 거치며 지휘관 자질을 기르는 엘리트 코스였다. 육사를 졸업한 그는 1956년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단장으로 있던 5보병사단에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육군정보학교 등을 거친 뒤 1959년 전두환과 함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랙 특수전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했다. 이 즈음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집을 드나들다 그의 누이인 김옥숙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동기생들과 육사 졸업생 친목 모임인 북극성회에 적극 가담했고, 1960년대 초반에는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군사정보대학을 거쳐 전두환과 함께 학생군사학교(ROTC) 창설 요원이 됐는데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전두환 등 육사 동기생들과 함께 '군사혁명 지지 카퍼레이드'를 이끌기도 했다. 베트남전을 거치며 그는 야전 실무형 군인으로 거듭났다. 1967년에는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이때 올린 전공으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육군대학을 거쳐 수도경비사단 대대장,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 공수특전여단장을 거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1979년 12·12사태 이후 그는 대한민국 서열 2위 권력자의 반열에 올랐다. 군인 노태우가 정치인 노태우로 변신한 계기가 된 셈이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그는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12월 12일 그는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포위한 사이 9사단 병력을 서울로 파견해 청와대와 정부를 장악했다. 거사에 나서기 전 그는 처고종사촌인 박철언에게 부인과 가족의 안위를 부탁하기도 했다.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을 체포하면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군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전국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조치를 발표했다. 신군부가 사실상 국가 전권을 장악하던 순간이었다. 다음날인 18일부터 광주에서는 신군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시위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살해한 데 대해 노 전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신군부의 2인자인 그였지만 13대 대통령이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낸 뒤 군복을 벗고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를 거쳐 1982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83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아 서울올림픽 유치부터 개최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했다. 1985년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내정되면서 당권을 장악했고, 1987년 총재로 등극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신영·장세동 등을 잠재적 후계자로 낙점했으나 개국 공신에 대한 예우를 주장하는 군부의 반발로 인해 그가 후보로 낙점된다. 결국 그는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바로 그날 전국적인 국민 항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6·10항쟁'으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들끓자 그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천명했다. 그해 말 대선이 6·10항쟁의 결과물이었기에 그가 당선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야권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그는 36%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그가 내건 슬로건이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였다.

퇴임 이후 그는 불운한 말로를 보냈다. 1995년 그는 수천 억원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징역 17년형, 추징금 2688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특별사면을 결정해 그를 사면·복권시켰다.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은 최근 광주를 찾아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장남 노재헌 씨는 2019년 12월 5일 광주를 찾아 사과한 데 이어 장녀 노소영 씨도 같은 해 12월 24일 광주를 찾았다. 노 전 대통령 자녀들이 이런 행보를 보인 것은 노 전 대통령 생전에 최대한 사과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고인은 위중한 상태에 이르자 자녀들을 통해 과거 잘못을 사과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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