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기업인 의욕 꺾는 일 없었으면"..노태우의 1995년 '비자금 사과문'

오경묵 기자 2021. 10. 2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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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10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연합뉴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의 씻을 수 없는 과오로 인해 저 이외의 어느 누구도 상처받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특히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밤낮없이 눈물겹도록 뛰어다니는 우리 기업인들의 의욕을 꺾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마지막 소망입니다.”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0월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8일 전인 같은달 19일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에서 폭로한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다. 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1993년 대통령 퇴임 직전 개설한 은행 차명계좌를 제시하며 “시중은행 40개 계좌에 100억원씩, 모두 4000억원의 비자금이 예치돼 있다”고 했다. 이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수사에 나서자 노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 서있는 것조차 말로는 다할 수 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이라며 “국민 여러분의 기대와 뜻을 무참히 저버린 이 사람이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느냐”며 입을 열었다. 그는 “국민 여러분 앞에 선 것은 저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라며 “국민 여러분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통치자금 문제에 대한 저의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고 사죄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통치자금은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정치의 오랜 관행이었다”며 “저의 재임 당시 우리의 정치 문화와 선거 풍토에서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관행이라고 해서, 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그것이 용납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이를 과감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고 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 동안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을 받아 5000억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됐다고 노 전 대통령은 밝혔다. 이 돈은 자신의 책임 아래 정당 운영비 등 정치활동에 사용됐다고 한다. 쓰고 남은 통치자금은 1700억원가량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엄청난 액수가 남게된 것은 대선으로 인한 중립내각의 출범 등 정치 상황의 변화 때문”이라며 “평범한 시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갈 사람이 그 많은 돈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는 “단 한 푼이 남더라도 이를 나라와 사회에 되돌려주어 유용하게 쓰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가지 상황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며 “통치자금을 조성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할 터인데 이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유용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다. 국민 여러분께서 내리시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다. 어떠한 처벌도, 어떠한 돌팔매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말하며 눈문을 훔치기도 했다. 그는 “다만 바람이 있다면 저의 씻을 수 없는 과오로 인해 저 이외의 어느 누구도 상처받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밤낮없이 눈물겹도록 뛰어다니는 우리 기업인들의 의욕을 꺾은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마지막 소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 여러분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느냐. 지금 이 순간 전직 대통령이었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과문 발표 20일 만인 같은해 11월 16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서울구치소로 향하기 전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며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른 기업인들을 보살펴달라”,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해 12월 5일 기업 대표 35명으로부터 2838억96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후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6900만원이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16년에 걸쳐 추징금을 냈다. 이 과정에서 동생 재우씨와 재산 반환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2013년 9월 동생 재우씨가 마지막 남은 추징금 150억4300만원을 냈고, 추징금 완납 이후 노 전 대통령 측은 “국민께 내세울 건 아니지만 1만분의 1이라도 할 도리는 했다는 생각을 (노 전 대통령 내외가) 하고 계신다”며 “공치사를 할 건 못 되지만, 여생을 불명예와 오점을 안고 살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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