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외국인 노동자 푸대접 소동에 경찰 출동 수사

박정우 2021. 10. 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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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내 코로나 감염자 격리 안 하고 음식 속에 벌레 나와

외국인 노동자 강력 항의하자 그제야 정부 조사

궂은일 도맡는 외국인 노동자 처우 개선 시급

싱가포르의 한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에서 방역 조치가 지켜지지 않고 노동자들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시달리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싱가포르 서부에 위치한 잘란 투캉(Jalan Tukang) 기숙사의 노동자들에 따르면, 기숙사의 노동자들 중 다수가 코로나에 걸렸음에도 의료 지원을 받지 못했고, 상하거나 벌레가 나오는 음식을 지급받는 등 열악한 주거 환경에 시달리고 있었다.

13일 기준 이 기숙사에 거주하는 2000여 명의 노동자 중 500명가량이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고용 회사나 기숙사 운영사는 감염자들을 격리시키지 않았고 고열 등 증상을 앓는 노동자들에게도 아무런 의료 지원을 하지 않았다.

온라인에는 12일부터 이들이 같은 방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코로나를 옮기지 않기 위해 길바닥과 복도 바닥에서 잠을 자거나 제공받은 음식에서 벌레가 나오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온라인에 올라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음식 속에 벌레가 있는 사진들 ⓒWeiXin

이런 푸대접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은 13일 다 같이 모여 기숙사 운영자들에게 항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 가긴 했지만 폭력 사태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례적으로 무장을 한 시위 진압 경찰대가 출동했지만, 경찰 출동 이후에도 별다른 위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수 경찰대가 출동하게 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날 소동 이후 이 기숙사에 거주하는 노동자들 중 반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셈코프 마린(Sembcorp Marine)사는 15일 발표를 통해 “기숙사에서 코로나 관련 지침들이 충실히 지켜지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이 싱가포르의 지침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이 왜 바로 지정 시설로 격리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또 셈코프는 노동자들의 음식을 제공하는 외부 납품업체에게 위생 수칙을 지켜달라고 전했다고만 하는 등 좀 더 강한 조치를 취하는 데에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사건이 언론의 관심을 받고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며칠간 노동자들에게 음식에 대한 의견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기숙사를 운영하는 회사인 웨스트라이트 어커머데이션(Westlite Accommodation)은 기숙사에서 코로나 관련 지침이 지켜졌지만 최근 기숙사 내 감염자 수가 폭증하면서 코로나에 걸린 노동자들을 지정 시설로 이동시키는 과정이 지체되었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싱가포르 노동부는 13일의 소동 이후 노동자들의 불만을 접수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노동부는 조사 후 기숙사 내에서 확진자들의 격리가 오래 지체되는 등 코로나 감염자 관련 지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노동부는 또 의료진을 기숙사에 파견해 코로나에 감염된 노동자들을 외부 회복 시설로 이동시키고, 의료 지원이 필요한 노동자들을 병원에 데려가는 등 필요한 의료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21일에는 코로나에 감염되었지만 증상이 없거나 심하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회복할 수 있는 중앙 시설에 5000개 이상의 침대가 준비되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직후 이번 사건 관련 회사나 운영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고, 지금까지 기숙사 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싱가포르 식품안전부는 음식의 위생 문제가 제기되고 9일이나 지난 10월 22일이 돼서야 음식을 납품한 회사에 대한 조사를 발표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코로나, 오래 가지 않는 대중의 관심

싱가포르에는 건설, 제조 등 임금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많은 인력이 필요한 업계에 수십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종사하고 있다. 자국민들로 이런 업계의 인력 수요를 충족할 수 없고, 학력이나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은 자국민들이 임금은 낮지만 일은 위험하고 힘든 건설 현장 등에서 일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 노동자들은 대다수가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 출신이며, 이들을 위해 지어진 대규모 기숙사에 거주한다. 코로나 이전에 이들은 보통 주말에 시내에 있는 리틀 인디아(Little India)나 차이나타운 등에 나가 일터의 피로를 풀었다.

◆싱가포르의 한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 한 방에 여러 명이 같이 살아 코로나 집단감염에 취약하다. ⓒ포와 그룹(Poh Wah Group) 웹사이트

하지만 작년에 코로나가 터지고 확진자들이 이런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 방에서 여러 명의 노동자가 같이 생활하는 기숙사의 특성상 코로나 집단 감염에 굉장히 취약하지만, 정부가 처음 코로나를 통제할 대책을 마련할 때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들은 대상에서 누락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4월부터 확진자 수가 본격적으로 치솟았을 때 확진자 대다수는 기숙사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에 정부는 확진자가 나오는 기숙사들 전체를 격리하기 시작했고,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기숙사 안에 갇힌 셈이 됐다.

이후 작년 6월부터 확진자 수가 하락세를 보이자 정부는 국민들의 외식을 허용하는 등 제재를 완화했지만, 이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배제된 채 올해까지 일터를 제외하면 거의 기숙사 내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BBC 등 외신에서는 싱가포르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일만 하는 죄수처럼 대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싱가포르 내에서도 의학 교수들이나 인권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동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시내에 나가 필요한 물품을 사거나 친구들을 만나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오랜 기간 기숙사에 갇혀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고, 이들도 주기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받는 만큼 밖에 나가도 코로나 전파 위험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외면했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통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지속되지 못한 싱가포르 국민들의 관심과 지원도 깔려 있다.

작년에 확진자 대부분이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에서 쏟아져 나오자 기숙사 내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언론과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도 여러 자선 단체들을 통한 국민들의 도움이 쏟아졌다.

하지만 코로나가 장기화되자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도움도 시들해졌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한 자선 단체는 작년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슈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을 때에는 자원 봉사자가 700명에 달했지만, 올해 7월에는 200명 수준으로 줄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의 한 건설 현장. 싱가포르에서 거의 모든 건설 노동자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외국인 노동자들은 싱가포르 경제의 한 부분을 책임지는 중요한 인력이다. 자국민들은 거부하지만 경제가 돌아가는 데 없으면 안 될 직종들에 고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없으면 싱가포르의 거의 모든 공사 작업이 중단될 정도로 이들은 싱가포르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싱가포르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싱가포르 = 박정우 글로벌 리포터 pjwpjw123@gmail.com

■ 필자 소개

Raffles Junior College 졸업

싱가포르 국립대학 의과대학(NUS Yong Loo Lin School of Medicine)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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