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노3김' 시대 저물다..직선제·북방외교 이끈 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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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는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6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공산권이 붕괴되리라고 보고 관련 외교 담당자들을 초빙하고, 관계회복을 위한 교류에 나섰다.
그는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했고, 그 결과 김영삼 정부 시절 평시 작전 통제권을 환수할 수 있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원활한 여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같은 해 5월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 회담을 열어 구속자 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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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기폭점..전두환 정권과 연계점은 부정적 평가
(서울=뉴스1) 김민성 기자 = 노태우 정부는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6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공산권이 붕괴되리라고 보고 관련 외교 담당자들을 초빙하고, 관계회복을 위한 교류에 나섰다. 소비에트연방(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1988년 8월8일에는 대국민담화를 통해 '중공'으로 불리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호칭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 항을 골자로 한 '7·7선언'을 직접 작성·발표해 미국 의존적인 외교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줬다.
그는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했고, 그 결과 김영삼 정부 시절 평시 작전 통제권을 환수할 수 있었다. 1991년 11월13일에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 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인 셈이다.
1988년 총선에선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원활한 여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같은 해 5월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 회담을 열어 구속자 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이후 그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추진해 1990년 3월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로 추대됐다.
초기에 '6공 황태자'라고 불린 박철언 등을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과 구 민주계의 반발에 굴복해 차기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김영삼에게 넘겼다. 이를 두고 군사정권 후신 등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쉽게 허락했다, 물렁하다"는 비난을 받게 됐다.
1988년 1월1일의 신년사에서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했다. 이에 제5공화국 시절 은근히 유행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가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는 이 같은 노력을 두고 일각에서는 '물태우', '5.5공화국'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5월22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교사 노조를 불법이라고 천명하고 해산·단속을 지시했다. 이후 전교조 가입 인사 및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계속하는 등 재임 기간 내내 전교조가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또 1990년 10월13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인 10·13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으로 알려졌다. 범죄와의 전쟁 선언 후 2년 뒤 각종 극성 범죄율은 약 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는 연평균 8.5%의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점, 제5공화국 출신으로서 5공 비리 청산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미진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취임 직후 제기된 5공 청산 여론과 관련해 '전두환 처벌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2년 이후 25년 만에 민간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데에는 의미가 있지만 노태우 대통령 역시 군인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을 들어 전두환 정권의 연장 선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m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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