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친절인가 간섭인가

최재봉 2021. 10. 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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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탐문]최재봉의 탐문 _03 해설
해설은 독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 작품의 주제와 성취를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은 얼핏 친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의 주체적 독해력을 무시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행위가 된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할 때 내게는 조금 이상한 버릇이 있다. 책의 본문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본문을 앞뒤에서 감싸고 있는 부차적 텍스트들을 먼저 읽는 것이다. 책 제목과 저자 이름이 적힌 앞표지를 확인한 뒤에는 표사(표4)라고 일컫는 뒤표지의 추천 글로 우선 눈이 간다. 이어서 서문이나 후기, 해설 또는 해제 같은 것들을 빠짐없이 챙겨 읽고 나서야 비로소 본문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습관은 물론, 그것이 본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겠지만, 그와 함께 또 다른 동기 또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을 듯하다. 가령 기사나 원고를 쓰기 전에 손을 씻거나 책상을 정리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등 한껏 해찰을 부림으로써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을 가능한 한 늦추는 버릇과 그것은 통하는 태도가 아닐까. 본문 독서로 직진하는 대신 이런저런 우회로를 경유해 보는, 일종의 회피 심리라고나 할지. 읽고 싶었거나 업무상 필요해서 손에 든 책인데도 그렇게 머뭇거리는 청개구리 심리라니.

그런 의미에서 서문과 후기, 해설 같은 ‘잉여 텍스트’들은 독자의 책 읽기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인 동시에 본문 독서를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이렇게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지닌 요소들 가운데 유난히 ‘한국적’이라 할 만한 것이 시집과 소설책 뒤에 붙는 해설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시집과 소설집, 장편소설 뒤에는 으레 해설이 붙는다. 간혹 해설이 없는 책들도 보이고, 최근 들어 그런 사례가 느는 것 같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해설이 없는 쪽보다는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해설과 함께, ‘시인의 말’과 ‘작가의 말’ 역시 거의 빠지지 않는데, 이 역시 한국에만 특화된 현상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영미 소설의 경우 소설 본문 이외에 작가가 쓴 글은, 헌사 말고는, ‘acknowledgements’라고 해서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표하는 감사 인사 정도뿐이다.

해설 얘기로 돌아가 보자. 외국 소설책에 해설이 들어가는 건 대체로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고전의 지위를 얻은 작품의 경우로 국한된다. 초판 출간 뒤 충분한 시간이 흘러서 문학적 평가가 마무리된 작품에 대해서 해설이나 소개 글을 덧붙이는 것이다. 번역 소설의 경우에는 자국 독자들에게 낯설 수도 있는 외국 작가와 그 작품 세계를 안내해 주는 역자 서문 같은 게 들어가기도 한다.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라는 소설에 보면, 젊은 나이에 아깝게 숨진 요절 작가의 유작을 책으로 내면서 그 작가의 대학 스승 등 주변 사람들의 글을 곁들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사례라 해야 할 것이다.

신작 시집이나 소설에 실리는 해설이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자칫 독자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독서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물론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쓰는 법이고, 보통의 독자라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의도를 파악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 완성되어 책으로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독자의 몫으로 맡겨 두어야 한다.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헤아려 읽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작품에서 읽어 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작가의 의도와 완전히 상반되는 독해도 가능한 것이 독서의 세계인 것이다. 해설은 그런 독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 작품의 주제와 성취를 세세하게 설명해 주는 해설은 얼핏 친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의 주체적 독해력을 무시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행위가 된다.

해설은 비평과는 다르다. 비평은 문학 행위의 일부로서 독자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영역이지만, 해설은 비평의 탈을 쓴 추천사에 가깝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해설은 대체로 출판사나 작가 쪽의 주문에 의해 쓰이는데, 그렇게 ‘주문 생산’된 글이 엄정한 객관성과 비판적 성격을 지니기는 쉽지 않다. 간혹 해설에서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대목을 만나기도 하지만, 가혹한 비판의 언사를 담은 해설은 보기 어렵다. ‘주례사비평’은 이렇듯 과도한 칭찬 일변도의 비평을 꼬집고자 고안된 표현이다. 해설의 이런 부정적 속성 때문에 자신은 해설을 쓰지 않겠노라고 공언한 비평가도 있을 정도다. 주례사비평의 문제는 문예지에 실리는 평론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문예지를 발행하는 출판사는 문학 단행본 역시 출간하는데, 자사에서 출간한 작품에 대한 비평을 잡지에 실을 때 아무래도 칭찬 일변도의 글이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표사에 실리는 짧은 추천의 글은 해설과는 조금 다른 맥락을 지닌다. 해설이 작품에 대한 전면적인 설명과 평가를 담는다면, 추천사는 작가나 작품의 특정 국면이나 특징에 대한 단편적 언급에 머물게 마련이다. 해설이 주로 평론가들에 의해 쓰이는 데 비해, 추천사는 동료 시인이나 소설가가 쓰는 경우가 많다.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일종의 품앗이 삼아 서로의 책에 추천사를 쓰기도 한다. 요즘은 추천사 ‘전문’ 필자들도 눈에 뜨이는데, 대체로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들이 여러 책에 자주 ‘등판’하는 듯하다. 독자들이 사랑하는 필자들인 만큼 권위를 지니고 신뢰를 주지만, 등판이 너무 잦다 보면 쓰는 이나 읽는 이나 피차 피로감을 느끼게도 된다.

발문은 해설과도 다르고 추천사와도 다르며, 어떤 의미에서는 양자를 결합한 형식의 글이라 할 수 있다. 발문은 텍스트에 대한 직접 정보와 평가라기보다는 작품을 쓴 작가나 시인에 대한 인물평 성격의 글이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간접적인 도움을 준다. 흠결이 뻔히 보이는 작품에 과도한 칭찬을 퍼부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청탁받은 쪽에서도 한결 부담 없이 쓸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좋은 발문은 작품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발문을 잘 쓰자면 해당 작가와 오랜 교유를 통해 깊은 인간적 이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다가 글을 맛깔나게 쓰는 문장력 역시 구비해야 한다. 한국 문학사에서 최고의 발문 필자를 꼽자면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관촌수필>과 <우리 동네> <장한몽> 같은 좋은 소설을 여럿 썼지만, 동료 작가들에 대한 인물평과 발문 성격의 글로도 독자들을 웃기고 울렸다. 그가 또래 작가 박태순과 윤흥길을 평한 글의 한 대목씩을 소개한다.

“그는 작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공용이 아니면 바라지 않고, 공적이 아니면 규탄을 참으니 비록 사사로운 기쁨이 있어도 상색(上色)함이 없으며, 혼자 불안을 만나도 침울하기를 삼갔다.”(박태순)

“오밀조밀하고 선이 가는 곱살한 얼굴에 시골서 달갑잖은 먼촌 일가 부스러기가 올라와 여러 날째 묵으며 쌀독 달랑대는 양식이나 파먹고 있는 집 사내처럼 들뜨름하게 끄먹거리는 눈, (…) 아무리 말쑥한 옷을 걸쳐도 반찬 없이 밥 먹고 나온 사람처럼 허름해 뵈던 보리밥 빛깔의 촌사람(…)”(윤흥길)

예스럽고 해학적인 만연체 문장으로 해당 작가의 사람됨을 절묘하게 잡아낸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현역 문인 중에서 발문을 잘 쓰는 이라면 소설가 한창훈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문구를 사숙했고 그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그가 각각 동료 작가 유용주와 시인 박남준의 책에 쓴 발문 일부를 읽어 보자. 세 사람은 문단에서 우애가 좋기로 호가 났는데, 여기 인용하는 것은 한창훈이 두 동료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담은 대목들이다.

“홍성장에서 황소 들쳐 메고 달려온 듯 뜨거운 기운을 내뿜으며 복도 저만치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대천왕 같은 물건이 있었다. 오오, 크고 넓기도 하지.”(유용주)

“버스 뒷자리에는 절대 안 앉을 것처럼 생긴 사내 하나가 바랑 같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데 참 개심심합디다. 풀여치 같기도 한데 나는 먹 갈기 싫어하는 화가가 그려놓은 그림 같습디다.”(박남준)

이문구와 한창훈의 발문을 읽으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을 깨물게 된다. 해당 작가의 풍모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하고 그 작가가 친근하게 느껴지며 그의 작품의 비밀에 접근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쓰는 이나 읽는 이나 부담스럽기만 한 해설과는 맛이 다르다. 그래서 제안한다. 신작 시집이나 소설책에 꼭 무언가를 넣어야겠거든 앞으로는 해설 대신 발문이 어떻겠는가.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30년째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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