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키기 위한 선택" 일본 마코 공주 결혼논란이 남긴 것 [시스루피플]
[경향신문]
평민 남성과 쉽지 않은 결혼
왕족 신분 포기한 공주 마코
아키히토 일본 상왕의 손녀 마코 공주(30)가 대학 시절 만난 동갑내기 연인 고무로 게이와 26일 결혼했다. 마코 공주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한 후 기자회견을 열고 “나를 조용히 걱정해주신 분들과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정보에 현혹되지 않고 응원해주신 분들게 감사한다”면서 “결혼은 우리 마음을 소중하게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고무로는 “한번 뿐인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고 싶다”며 결혼 문제로 폐를 끼친 분들께 죄송하다고 밝혔다.
마코 공주는 이날 ‘고무로 마코’로 이름이 바뀌었고 왕족의 신분도 잃었다. 일본에서 왕족 남성은 결혼 후에도 신분을 유지하고 왕족과 결혼한 평민 여성 배우자도 왕적에 이름을 올리고 왕실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왕족 여성은 평민과 결혼하면 왕적을 잃고 일반인이 된다. 마코 공주는 평민과 결혼해 왕실을 떠날 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금인 1억6000만엔(약 16억원)도 받지 않기로 했다. 결혼식은 물론 왕실과의 작별 의식도 모두 생략했다. 마코 공주는 여권, 비자 수속이 끝나는 대로 11월 중 고무로가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1991년생인 마코 공주는 아키히토 상왕의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맏딸이다. 아키히토 전 일왕의 손자·손녀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났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왕가를 신성시하는 극우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왕실이 되고자 했다. 일왕의 이 같은 뜻과 왕실의 장녀라는 위치로 인해 마코 공주는 유치원 때부터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인터넷에 사진이 돌아다니고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중계된 첫번째 일본 공주가 됐다. 슈간분슌은 “마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 손자 세대의 새로운 모범으로 왕실에 보다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고 전했다.
마코 공주의 기존 이미지는 ‘말 잘 듣는 맏딸’이었다. 왕실의 맏이로서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요구도 강하게 받아왔다. 열다섯살 어린 남동생 히사히토가 태어난 뒤로는 장차 일왕이 될 동생이 돋보이도록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주문까지 더 얹어졌다. 고등학생인 열일곱살 때부터 일본 왕실의 일원들이 해야 할 각종 공무를 시작했다.
마코 공주와 고무로의 인연은 2012년 도쿄에 있는 국제기독교대학(ICU)에서 시작됐다. 두 사람은 2017년 9월 약혼을 발표하며 서로를 태양과 달에 빗대기도 했다. 특히 고무로가 “(마코 공주는) 달과 같이 조용히 나를 지켜봐주는 존재”라고 표현해 대중의 호감을 얻었다. 하지만 타블로이드 언론들이 고무로의 가족사를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여론은 싸늘해졌다.
고무로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홀로 아들을 키워온 고무로의 어머니가 사귀는 사람과 금전분쟁을 벌이고 있다는 한 주간지 보도의 파장이 컸다. 이후 선정적 보도가 쏟아지면서 고무로의 어머니는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여성’으로 까지 묘사됐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고무로가 돈을 노리고 왕실에 접근했다는 의심도 커져갔다. 고무로는 약혼 발표 다음 해에 미국 대학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이를 두고도 특혜 의혹이 이어졌다. 일본 언론들은 지난달 27일 고무로가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채 결혼을 위해 입국하는 장면을 잇따라 보도하며 그가 공주와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주간 아에라가 지난달 30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가 “마코 공주와 고무로의 결혼을 축복할 마음이 없다”고 답했다. 자신과 고무로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마코 공주는 지난 1일 복잡성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상태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CNN방송은 마코 공주에 가해지는 비판을 두고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평민은 왕족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는 일본인의 계급 의식, 여성 혐오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마코 공주가 특히 시민들에게 밉보인 것은 일본 왕실에 기대되는 ‘자숙’을 거부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현재 일본 왕실은 정치적 실권은 물론 사유재산도 없다. 궁내청 연간 예산은 지난해 기준 108억엔에 달하지만 모두 정부 예산으로 왕실이 자의적으로 1원도 사용할 수 없다. 일본국 헌법 제1조는 왕을 일본국과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왕실 스스로도 검소하고 조용하게 사는 걸 미덕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여론의 반대와 논란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결혼을 고집하면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 공주의 모습에 시민들이 반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근·현대 일본 천황제를 연구해 온 가와니시 히데야 고베조가쿠인대 교수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인간을 상징으로 삼는 한 개인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인간의 자유와 천황제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방송프로듀서 겸 작가 데이브 스펙터는 “왕실폐지론까지 논의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뤄져야 국민들도 왕실을 존중하면서도 가십거리로 삼고픈 욕망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마코 공주의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계기로 ‘천황제란 무엇인가’라는 뜨거운 질문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셈이다.
마코 공주의 결혼과 미국행으로 4년간 끌어온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앞으로도 제2, 제3의 마코 공주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왕족 신분이 아닌 마음을 지키기 위한 마코 공주의 선택으로 인해 다른 젊은 왕족들도 이제는 ‘강요된 자숙’과 ‘상징’으로서 역할을 거부할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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