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차별 해소하려 정규직 임금 삭감?..일본 기업들 해법 보니
[경향신문]
일본 야마구치시의 유명 프랜차이즈 병원인 사이세이카이야마구치 종합병원 정규직 9명은 지난 1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병원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해소한다며 정규직이 받던 기존 수당을 삭감했다는 이유에서다.
병원은 지난해 10월 취업규칙을 변경해 정규직에게만 지급하던 가족부양수당과 주택보조수당을 전 직원들에게 지급하기 시작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을 금지하고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명시한 노동법 개정에 따른 조치였다. 취업규칙 변경 후 정규직에게 지급되던 기존 수당은 월 540~3000엔(약 5000~3만원) 가량 줄었다. 생애소득이 467만엔(약 4800만원)까지 감소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에 반발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가 일본 노동법의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을 어겼다고 야마구치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노사 양측은 법정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병원 측은 “변경된 취업규칙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불이익이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또 변경 전 취업규칙에서 부양수당은 가정의 주부양자들만 받도록 돼 있어 전 직원의 77%인 여성들은 받지 못하고 남성 직원들만 주로 타 가는 불합리함이 있어 개정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노동계약법 9조는 노사 합의 없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취업규칙을 바꾸는 일을 금지하지만 10조에서는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명시했다. 회사가 변경 후 취업규칙을 충분히 알리고 취업규칙을 변경할 필요가 있었으며 노동자가 받는 불이익이 경미한 경우 등이 해당한다. 이 병원의 직원은 총 660명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한 정규직은 60명 가량이다.
소송을 낸 직원 측은 “지난해 병원이 4억6906만엔의 흑자를 봤다”며 “종래의 정규직 수당기준을 비정규직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재정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맞섰다. 병원 측이 수당기준을 개편한 목적은 결국 인건비 절감이었다는 주장이다. 또 병원 측이 취업규칙 개편 전 설문조사 등 충분한 의견수렴을 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재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해소 조치가 기존 정규직의 임금삭감으로 이어져 갈등을 겪는 기업은 사이세이카이야마구치 종합병원 뿐 아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동일임금법제에 맞춰 정규직 수당을 깎는 기업이 늘고 있다”며 “격차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사실상의 임금삭감이라는 비판을 부를지 급여체계 개선으로 직원들의 사기를 높일지 각사 경영 수완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25일 보도했다.
일본에서 동일임금 원칙은 2018년 법제화됐다. 1990년대 장기불황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이 20년 넘게 보수적 경영을 해온 결과 비정규직이 대폭 늘어나고 정규직과의 격차도 사회문제로 불거지면서다. 2013년 시작된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 기업들의 실적은 엔저 현상에 힘입어 개선됐지만 임금수준이 정체인 것도 비정규직 비율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2017년 기준 일본의 비정규직은 37.3%이며,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65% 수준이다. 환율을 고려해 실질 구매력을 비교할 수 있도록 계산한 1인당 실질국민소득은 2018년 한국이 4만1409달러, 일본이 4만1001달러로 일본을 역전했다.
일본 대기업은 지난해, 중소기업은 올해부터 동일임금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갈등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소재 사이트 운영사 픽스타는 자녀 1명당 월 1만엔씩 주던 자녀수당과 결혼·출산 축하금을 지난 4월 폐지하고, 정규·비정규직 막론하고 생일에 1만엔씩 주는 제도로 바꿨다. 다만 기존 정규직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기본급을 높였다. 픽스타 측은 수당체계 변경 전 직원들을 상대로 사전설명회를 열고 “결혼, 출산 등을 선택한 삶 뿐 아니라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에 상응할 수 있는 수당제도로 대체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마케팅 회사 멤버스는 수년 전부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면서 재택근무 수당과 신입사원에게 제공하던 주택수당을 없앴다. 다카노 아키히코 멤버스 이사는 “수당에 나갈 돈을 임금으로 돌려 최대 7.1%까지 임금인상이 이뤄지도록 했고 젊은 세대 중심으로 배분했다”며 “사원과 경영진으로 이뤄진 사내협의회에서 거주지의 차이나 생활비가 반영되는 수당 대신 성과에 따라 보수를 지불하겠다고 정중히 설명하면서 직원들의 납득을 얻어냈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려면 정규직이 부담을 져야 할 가능성도 있다. 직원들의 수용은 회사가 얼마나 정중하게 제도 변경의 이념을 설명하고, 감액분을 보상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지에 달렸다”며 “경영진 측의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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