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진 교수, 보물 제1003호 초서본 '임진일기' 역주서 및 자료집성 출간

기자 2021. 10. 2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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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간 임진일기’(322면) 및 ‘검간 임진일기 자료집성’(714면)(보고사, 2021)

기록 문헌에 담긴 선조의 경험을 통해 재난의 시대 극복할 동력 제시

코로나19가 확산된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전염병의 공포가 단지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큰 분기점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17세기 동아시아의 큰 전환을 야기했던 ‘임진왜란’을 떠올릴 수 있다. 조선, 일본, 중국이라는 세 나라가 대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은 큰 재난 가운데 하나로, 동아시아 전쟁 이후 조선에서는 17세기 중반 경신 대기근으로 일컬어지는 ‘기근’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동시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바 있다.

17세기 조선의 경우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의 역사에서도 대변혁의 원인을 곰곰이 조명해보면 거기에는 ‘전쟁’, ‘전염병’ 등과 같은 ‘재난’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재난’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인류의 곁에 잠복해 있는 상시적 공포라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는 인지된 재난의 위험 속에서 생사를 구속당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을 반복적으로 살아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재난’에 대한 인식, 대처 등에 대한 근본적 시각의 변화를 요구한다. 과연 인류는 상시적 재난 앞에서 어떤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코로나19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인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백신으로 대표되는 현대 생명공학 기술의 결과물은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큰 기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백신 개발이라는 시간 속에서 인류가 스스로 감당해내야만 했던 정신적 공포 또한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 블루(corona blue)’로 명명되는 인류의 정신적 우울은 개인과 공동체의 근본적 안위를 위협하면서 예상치 못한 시공간 속에서 출몰을 반복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코로나 블루가 남긴 후유증은 세대를 거듭해 가며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근본적인 치유 방안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지구적으로 주어진 공통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인류의 방향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역할일 것이다.

인문학은 늘 인류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고, 정면에서 대응해왔다. 그 과정에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지만, 인문학 스스로 치유의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그것을 극복해왔다. 그렇듯 위기에 처한 인류의 급박한 질문과 요청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지혜와 혜안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재난’ 극복을 위한 지혜를 모색하기 위해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재난 관련 문헌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인문학적 길 찾기의 한 방법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의 ≪임진일기≫는 주목을 요하는 문헌인데, 최근 전남대학교 신해진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이와 관련된 역주서와 자료집성을 출간하면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귀중한 문헌학적 자료이자 생생한 역사적 자료, 초서본 현전 ≪임진일기≫를 만나다

초서본 현전 ≪임진일기≫는 상하 2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2책은 필체와 구성 등이 동일하며 중간에 9일간(1592.6.6.~6.14)의 기사가 누락되긴 했으나 내용은 연속되어 있다. 상권은 4월 14일부터 6월 5일까지 51일간의 기사가, 하권은 6월 15일부터 12월 27일까지 191일간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어 총 242일간의 일기가 된다. 기술형식에 있어서 월일은 행을 달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기사가 없는 경우에는 일자(日字)와 일기(日氣)만 적고 행을 달리하지 않은 채 연서(連書)하기도 했다. 기사는 초서(草書)로 쓰였으며 수정하거나 첨삭한 곳도 상당수 있다. 이 일기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피란 체험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통해 전란의 포화 속에서 삶을 부지했던 백성들의 경험을 조선이라는 현실 공간과 함께 사실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동시에 당시의 사회상, 조정과 민간의 실상, 군대의 배치상황, 의병의 활동상 등에 대한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문헌학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검간(黔澗) 조정(趙靖),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하다

조정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안중(安仲), 호는 검간(黔澗)으로, 아버지 조광헌(趙光憲)과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서 4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정은 퇴계의 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군의 참모로서 무기와 군량 조달에 힘쓰는 등 큰 활약을 했다. 조정은 1599년 희릉 참봉, 1600년 광흥창 부봉사, 1603년 군기시 주부 등을 거치며 관직 생활을 한 뒤, 사마시에 합격하고 호조 좌랑이 되었다. 이후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주요 낭관 벼슬을 거쳐 대구 판관에 제수되었다가 중국인을 쇄환한 일로 파직되어 고향 상주로 돌아왔다. 1612년 청도 군수, 1623~25년 김제군수, 1626년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내섬시 정(內贍寺正)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강화도에 들어갔고 얼마 후 봉상시 정(奉常寺正)에 제수되었다. 조정은 1626년~28년에 낙동면 승곡리 갑장산 자락에 양진당(養眞堂)을 짓고 독서와 강학에 열중하다 1636년 82세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조정의 ≪임진일기≫, 보물 1003호로 지정되다

17세기 임진왜란을 겪었던 인물들 가운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여럿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처럼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은 도처에 존재한다. 이들 기록은 파편적이고 전문한 것을 옮기는 데 그치고 있으며 전란 이후 기억의 편린에 따라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기록 문헌의 수는 많지만 정작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고 미시적으로 남긴 자료는 상대적으로 드문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임진일기≫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다양한 기록 문헌들 가운데서도 당대의 참혹한 현실을 촌각을 다투어 기록한 생생한 자료라 할 수 있으며, 가장 원천적인 날것(the raw)에 해당되는 문헌자료라는 점에서 다른 임진왜란 관련 기록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과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조정의 ≪임진일기≫는 보물 제1003호로 지정되었고 경북 상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 의병군의 활약과 위정자의 실상을 기록하다

그렇다면 조정의 ≪임진일기≫에는 어떠한 내용이 실려 있을까? 조정은 전란과 관련된 다양하고 상세한 정보들을 기록했다. 전란이 발생한 직후 조선의 여러 지역에서는 국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은 산발적이고 상세하지 않다. 또한 각 지역에서 거병한 기록은 기록자의 상황 및 기억, 그리고 정치적 맥락에 따라 착간이 발생하기도 하여 내용이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정은 상주지역 전쟁에 직접 참전함으로써 해당 지역 의병군의 조직 과정과 활약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 점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침식사 후에 찰방(察訪: 保安察訪) 권종경(權從卿: 權景虎, 趙竤의 4촌처남), 내한(內翰) 정경임(鄭景任: 鄭經世)과 함께 황령동(黃嶺洞) 어귀로 가서 왜적을 토벌하는 일로 회동하였다. 처음에는 이홍도(李弘道: 李士廓, 權景虎의 손자인 權以說의 장인, 권경호의 아들 權淳은 趙竤의 4촌처남), 채유희(蔡有喜: 李逢의 생질) 등이 맨먼저 의병을 일으키는 거사를 꾀하고서 채중구(蔡仲懼: 채유희)가 청주(淸州)로 가 그의 외숙 이봉(李逢)과 궁수(弓手: 활잡이) 17,8명을 맞아 왔다. 함창(咸昌), 문경(聞慶) 등지의 궁수 및 사족(士族)들도 같은 소리로 호응하고 모두 이곳에 모이니, 사족은 40여 명에 가까웠고 활을 쥘 수 있는 자가 청주 사람들까지 합하여 또한 50여 명에 가까웠다. 중론에 따라 이봉(李逢)을 상장(上將)으로 추대하였고, 함창의 이천두(李天斗)를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았으며, 전식(全湜), 송광국(宋光國: 검간의 셋째아들인 趙弘遠의 장인), 조광수(趙光綬: 검간의 3종조부) 및 나는 좌막(佐幕: 참모)이 되었고, 채천서(蔡天瑞), 홍경업(洪慶業)이 서기(書記)를 맡게 하면서 나도 그것을 겸하도록 하였다.[7월 30일]

창의군으로 불린 의병진이 상주에서 처음 결성된 것은 7월 30일이었고, 조정은 창의군의 좌막(佐幕: 참모) 겸 장서(掌書: 서기)를 맡았다. 이는 경북 상주지역 의병군의 조직 과정 및 활약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외에도 전란을 둘러싼 전세와 관군, 의병의 활동, 조야의 실상, 백성들의 수난상 등이 다각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는 ≪임진일기≫가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기에 전세의 상황과 의병의 활동이 핵심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의병장으로서 조정은 다른 지역에서 펼쳐지는 전황에 대해서도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의병이나 관군이 승전한 소식은 아군의 사기와 직결되는 부분이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기록했다.

영남의 각 고을을 지키는 수령들이 적의 침공 소식만 듣고도 성을 버리고 먼저 달아난 것은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 큰 고을이든 거대한 진(鎭)에서든 성을 지키고자 피 흘려 싸운 곳이 하나도 없었으나, 유독 용궁현(龍宮縣) 우후(禹侯: 禹伏龍)만이 성을 매우 굳게 지키며 성벽을 견고히 하고 흔들리지 않았는데, 적의 형세가 비록 치성했을망정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주 작은 쇠잔한 마을로 그 백성이며 병장기들이 왜구를 대적하기에 십분의 일도 되지 못하는 데다 또 성곽(城郭)도 없어 적을 방어하기가 더욱 어려웠으나, 굳게 지키고 사력을 다해 항거하여 끝내 함몰되는 참화를 모면했으니 진실로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군사의 다수에 달린 것이겠는가? 용궁현감의 소문난 명성이 오래도록 자주 들렸다. 지금 큰 변란을 당하여 앞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빈 말이 아님을 더욱 믿게 되었다. 탄복할 만하였고 탄복하였다[5월 8일]

조정은 용궁현감 우복룡이 왜적에 대처하여 성을 지켜낸 소식과 그에 대한 탄복의 심정을 기록했다. 이날 기록된 내용은 다른 날에 비해 양이 많다. 승전 소식과 함께 다른 지역에 대한 정세와 비판이 함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승전을 알린 용궁현감과 비교해서 상주 목사 김해는 산사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순변사 이일(李鎰)이 성을 버리고 들판에서 싸우는 계책을 쓴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관원의 무능을 격정적으로 질타하고 있다. 조정은 특히 본인의 고을을 책임졌던 상주 목사 김해의 무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과(武科) 출신인 윤식(尹湜)이 의외로 용궁(龍宮)의 진영(陣營)에 가서 왜적과 접전하며 몇 명의 머리를 베고 오자, 목백(牧伯: 尙州牧使 金澥)은 우리 고을의 적을 잡지 않고 멀리 다른 고을에 갔었다는 이유로 장형(杖刑) 50대를 심하게 쳤다고 하였다. 윤식이 저 고을로 간 것은 그가 원하고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단지 우리 고을에는 주장(主將)이 없어서 군사들을 모아 적을 공격할 그 방도가 없었지만, 저 고을은 수령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병사를 거느리고 방어에 힘쓰는데 한결같이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그에게 의지하여 전공(戰功)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 고을이든 저 고을이든 막론하고 그가 나라의 적을 죽이는 것은 똑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토주(土主: 고을수령)가 정치를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아야했지만, 그 품은 뜻이 나라에 있지 않으면서도 남의 능력을 가리고 전공(戰功)을 시기하여 반드시 자신의 진영(陣營)에서만 움직이려는 실상을 이것으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7월 5일]

조정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백성의 목숨을 책임져야 할 위정자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훗날 정치적 맥락으로 비화하면서 필화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목숨의 위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조정은 눈으로 목도한 위정자의 무능을 회피하지 않고 직접적인 비판의 목소리로 아로새겨놓았다. 이는 위정자의 무능은 곧바로 백성의 목숨과 직결된다는 문제의식을 조정이 늘 견지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의 수난과 핍박 속에서 국가의 역할과 책임, 인간성의 본질을 묻다

조정은 위정자의 실상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및 상주지역 사람들의 피난 상황 등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피란 상황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은 식량 자급 문제였다. 모든 가산을 버려두고 시급히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은 본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을 겪고 있는 조선 백성의 공통 문제였기에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가장 최우선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견해가 피력되고 있다.

화령현(化寧縣: 상주의 서부지역) 창고에서 진휼 곡식을 지급한다는 기별을 듣고 어린 사내종을 데리고서 걸어 화령현의 창고로 돌아갔는데, 한 식경(食頃: 밥을 먹을 동안)이나 걸었을까 두 발이 다 부르터져 딱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감관(監官: 곡식 출납 관리) 윤효인(尹孝仁)이 그 출납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창고를 진즉 열지 않았고 날이 저물어서도 지급하지 않아서 끝내 빈손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몹시 미웠으나 어찌하겠는가.[5월 17일]

화령현 창고에서 진휼 곡식을 지급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직접 어린 종을 데리고 한 식경을 걸어갔으나, 감관 윤효인이 창고 출납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상황을 원통한 심정으로 기술했다. 생사를 진휼에 의지하고 있는 백성의 절박한 상황과 심경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관원의 무관심을 대조시켜 힘없는 백성들의 참담함을 절절하게 밝혀놓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급하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이자를 치르면서까지 식량을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 아침에 마부와 말을 가은리(可隱里: 加恩)로 보냈는데, 김지원(金至元)․ 신응개(申應漑) 집에서 장리(長利)를 놓으며 곡식을 내주었기 때문이다.[5월 18일]

관청의 진휼이 원활하지 않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식량을 구하려면 사적인 방법이나 경로를 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가혹한 상황일지라도 백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특히 장리를 놓는 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이해타산만을 고려한 가혹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이라는 생사의 위기 앞에 놓인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최선이었음을 포착해내고 있다.

마을에 있는 소와 말을 왜놈들이 전부 잡아가서는 식량을 실어보내거나 타고 다니거나 하였는데, 발걸음이 더디고 쓸모가 없는 것은 선물로 바쳐진 것도 그 수효가 극히 많았으며, 그래도 이루 다 쓸 수가 없었으므로 중도의 길가에 내버려진 주인없는 소와 말이 곳곳마다 가득하였다. 변변치 못하고 졸렬한 무리들은 남몰래 거두어 취하였으니 많이 얻어간 자는 거의 여덟아홉 마리에 이르렀고, 헐값에 매매되어 다투어 서로 잡아먹었으니 산골짜기에서 하룻동안 죽어나간 것도 10여 마리에 모자라지 않았다. 열흘도 되지 않아 마을에서 길렀던 가축들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에 이를 것이니, 설사 난리가 끝난들 사람들이 본업으로 돌아가서 농사짓는데 꼭 필요한 것을 장차 무슨 가축물(家畜物)에 기대겠는가? 예로부터 병란(兵亂)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으랴만, 사람과 가축이 다 없어진 것은 어찌 오늘과 같은 경우가 있겠는가? 통탄스럽고 통탄하였다.[5월 12일]

국가와 국가의 전쟁 속에서 가장 핍박받는 이들은 정작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상인 백성들이다. 그들은 맨몸이었기에 총칼의 무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급박하게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때문에 가산에 해당되는 가재도구와 양식, 농사에 필수인 가축 등을 모두 버려두고 나와야 했는데 그러한 것들을 왜적들은 모조리 약탈해 가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왜적의 약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인 없이 남겨진 소와 말 등을 다른 백성들이 갈취한 데에도 있었다. 물론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과 소유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재난의 고통을 동시에 겪는 상황에서 타인의 위험을 발판으로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정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현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은 생사를 목전에 둔 백성의 고통이 단순히 수난과 핍박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것은 단순히 가축을 훔치는 이기심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대개 도적의 무리는 태반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이 혹시나 해서 그들의 안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지난날 여러 해 왕래했던 소금 장수들로서 그들의 말투라는 것이 왜놈과는 비슷하지 않은데도 왜놈들 옷을 빌려 입고서 머리를 깎고 자취를 감춘 것이니, 만일 지난날 얼굴이라도 알고 지냈던 사람을 만나면 번번이 머리를 숙이고서 보기를 꺼려 피한다고 하였다. 이들은 독기를 더욱 혹심하게 부려 깊숙이 궁벽한 곳까지 샅샅이 뒤져 범같이 잡아들이는데 저촉되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불에 태웠으니, 그 해악은 진짜 왜놈들보다 더 심하여 장래의 근심이 또한 단지 왜구에만 그칠 뿐만이 아니라서 몹시 애통하고 애통하였다.[5월 2일]

5월 2일의 기록은 전쟁 속에서 백성들의 일부가 왜적에 투항하여 앞잡이 역할을 하는 행태를 담고 있다. 조정은 그들 역시 조선 사람이기에 자신의 모습을 들킬까 염려하면서도 독기를 부리면서 왜적들보다 더 악랄하게 약탈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큰 근심거리가 된다고 적었다. 전쟁 속에 노출된 인간성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정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불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냈다. 전쟁을 중심으로 드러난 조선 사대부의 이면과 백성의 처참한 상황이 담긴 ≪임진일기≫, 그 기록에 새겨진 현실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참상, 그 자체였다. 조정은 그러한 참상을 눈으로 바라보며 매어오는 통탄한 심정을 가누면서 한 자, 한 자 기록해나갔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후세를 위한 교훈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발턴(subaltern)’으로 명명되는 하층계급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하다

≪임진일기≫의 기록성은 세부적인 인명과 지명에서도 드러난다. 조정은 하층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대부나 위정자와 마찬가지로 세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록하고 있다.

밥을 먹고 난 뒤, 마침내 각자 따로 떨어져 지내기로 마음을 먹고서 피란 봇짐을 점검해 보니, 남은 식량이라고는 겨우 한 끼를 지어 먹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쌀 5말을 나누어 주니, 이는 17명이 사나흘 동안 먹을 양식으로 족하여 그대로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숨어 지내려는데, 그 산 또한 노곡(蘆谷) 땅으로 신선들이 사는 곳처럼 깊고 은밀하여, 골짜기마다 나뉘어 지내더라도 딴 산과 다를 바 없었다. 나와 함께 갈 사람들은 아내 이하 아들로 기원(基遠), 영원(榮遠), 홍원(弘遠) 계미생(1583), 형원(亨遠) 을유생(1585), 딸로 무의(無儀) 정해생(1587), 사내종으로 범개(凡介), 춘복(春卜), 득수(得守) 계유생(1573), 막동(莫同) 을해생(1575), 두성(豆成) 경진생(1580), 명래(命來) 계미생(1583), 계집종으로 희덕(希德) 무오생(1558), 별금(別今), 수옥(水玉), 운월(雲月), 금춘(今春) 7세, 희덕에게 또 젖먹이 자식이 있으니, 합계 열일고여덟명이다.[4월 29일]

하층계급 사람들이 피란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자식의 이름뿐만 아니라 집에 부리는 사내종과 계집종의 이름, 생년까지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통념상 종의 경우에는 그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년까지 기록하는 등 하층계급 사람들에 대한 기록에서도 동일한 기준을 고수했다. 사실상 이름을 불리지 않는 사람은 존재를 증명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호명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조정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역사적 존재로 생환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서발턴(subaltern)’으로 명명되는 하층계급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조정의 ≪임진일기≫가 여타의 기록 문헌과 비교할 때 기록에 대한 엄정성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문헌임을 확인시켜준다. 이처럼 조정의 일기는 기록 문헌이 지니는 특수성으로 보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

남은 문제는 이러한 중요한 기록 유산을 현재의 우리가 읽고 역사적 현실과 소통하고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인데, 이를 위해서는 기록 문헌에 대한 총체적인 번역과 체계적인 자료집성이라는 방대한 작업이 요청된다.

역사적 기록 문헌의 인물 추적과 지명 고증에 한 획을 긋다

‘검간 임진일기’ 역주서는 기존의 역주서와 달리 역사적인 인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인물백과식 조사에서 벗어나 인적 네트워크의 차원에서 연결되는 학연, 지연, 혼맥 등을 낱낱이 확인하여 밝히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족보, 읍지, 문중 소장 잡록 등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한문 문헌 자료를 총체적으로 입수하고 조사하여 생몰연대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주석으로 덧붙여놓았다.

또한 지명의 경우에는 주체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시·도·군·면 단위의 행정구역은 물론 향토지명연구가의 협조를 구해 자연부락 단위까지 세밀하게 조사하여 특정화하였다. 사실상 옛 지명과 관련된 부분은 상세한 고증이 대단히 어려운 부분이다. 가령 자연부락 명칭의 경우,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옛 우리말의 호칭을 전통으로 반영한 것이면서 다시 후대에 이르러 한자어로 바뀌는 과정을 거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우리말 지명의 경우에는 한자어로 변환되는 과정까지 추적해야 하는 문제가 난관으로 작동한다.

본 역주서는 자연부락 지명에 대해서도 해당 지역의 향토지명연구가 및 지역문화원 관계자에게 직접 문의를 구하고 기록 문헌에 대한 다층적인 검토 과정을 통해 자연부락 지명을 구체적으로 고증해냈다. 이는 역주서의 완성도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사 및 지명사 분야에서도 한 획을 긋는 작업으로 학계에 큰 자극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17세기 민족수난기의 입체적 문화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후속 연구를 추동하는 토대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검간 임진일기 자료집성’, 기록의 변모 과정을 밝혀 문헌학적 정수를 마련하다

‘검간 임진일기’와 함께 출간된 ‘검간 임진일기 자료집성’은 검간 친필 초서에서 시작하여 초서정서본, 판각정서본, 목판본으로 이어지는 현전 자료를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전통시대의 문헌은 문집으로 판각되어 간행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 저자가 생전에 남긴 생생한 문헌자료는 후손이나 문중, 제자에 의해 산삭과 변개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문헌은 후손과 가문의 시각에서 지속적인 변주가 이루어지면서 가공된 문헌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는 문집 자료는 저자가 남긴 원자료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런 점에서 원자료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조정의 ≪임진일기≫ 또한 문헌 변주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현전하는 문집 소재 자료는 조정이 기록한 초서자료에서 초서를 정서한 초서정서본의 과정을 거친 후 문집으로 판각하기 위해 정사한 판각정서본을 거쳐 목판본으로 최종 간행되었다. 이때 판각된 문집 목판은 다양한 개정과 변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최종 결과물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변주의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여러 형태의 이본을 비교·검토하여 출입 양상을 꼼꼼하게 밝혀놓은 것이 바로 ‘검간 임진일기 자료집성’이다. 이는 최종 텍스트를 둘러싼 자료의 유전, 변이 양상을 다각도로 검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문헌학적 정수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학술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검간 임진일기’, 인문학의 힘으로 재난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동력을 제시하다

코로나19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오늘날, ‘검간 임진일기’는 ‘재난인문학’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오늘을 진단하고 다가올 내일을 전망하는 통시적 경험의 보고(報告/寶庫)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재난’으로 현시되는 인류 공통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선인들의 혜안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로서 의미 있게 활용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아울러 그것은 과거와의 소통을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반추하고 미래의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인류의 지적 유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인문학의 힘을 또한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 첨단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문학적 성찰이 더욱 요청되고 있는 오늘날, 현전 초서본 ≪임진일기≫의 역주서와 자료집성 출간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역사적·문화적 경험의 통로를 마련하고, 선인의 경험이 담긴 문헌의 독해를 통해 창발되는 인문정신을 확산시킴으로써 인류의 지혜를 넓히고 사회적 발전을 견인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과거의 모습(조선)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미래사회를 창조할 확장적 시야를 견인하고,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극복하여 언어·문화적 소통을 이끄는 중요한 매개로서 학계와 사회에 중요한 동력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해진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문헌의 번역을 비롯한 업적 등을 인정받아 ‘용봉학술상’과 ‘용봉학술특별상’을 모두 수상한 학자다. 전통시대 문헌에 대한 발굴과 교감, 역주 작업 등을 통해 85권의 학술서적을 간행하고 후속 연구에 앞장서고 있다.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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