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 찾아온 그에게 눈치 준 기억 안 잊혀.. 안타깝고 그리워

기자 2021. 10. 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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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으며 타협을 모르는 정의의 사나이였다.

내가 무역회사에 입사했을 때 그는 나보다 1년 먼저 회사에 입사해 은행 출입업무를 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운도 없는 게 그의 운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날 찾아오곤 했을 때 내가 싫은 눈치를 준 것은 아닌지, 가게 저만치서 서성이던 그를 봤을 때 달려가서 붙잡을 걸 하는 후회도 들지만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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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합니다 - 친구 정부현에게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으며 타협을 모르는 정의의 사나이였다. 또 한편 융통성이 전혀 없는 고집쟁이 인간이었다. 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했으면 교장 선생님까지 했을 것인데 유명대학 법학과를 나와서 무역회사에 들어간 건 그의 인생엔 잘못된 출발점이었다. 그도 평소에 그런 후회를 넋두리하듯 하곤 했다.

그는 유복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면서기로 근무한 인텔리였는데 6·25전쟁 중 북한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새벽에 잠자다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한 지 4개월이었다. 북한군 총길 아래서 면서기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내가 무역회사에 입사했을 때 그는 나보다 1년 먼저 회사에 입사해 은행 출입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 사원들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상사와의 소통 방법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유복자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게 남자 상사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업무능력을 떠나 그런 성격은 그가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였을까? 그의 입사 동기가 그의 부서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바로 사표를 냈다. 그의 자존심상 그런 상황은 용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아주 작은 기업체에 잠시 있더니 금방 그만두고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그는 그 직업이 몸은 힘들어도 더 좋다고 했다. 노력한 만큼 수입이 따르고 남의 눈치 안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가 맡은 구역은 신월동이었는데 내가 신월동 집으로 퇴근하는 도중 우연히 나를 만나면 그는 큰 소리로 부르면서 신문을 몇 부씩 공짜로 주고 가곤 했다. 나 역시 외환위기(IMF)를 만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신문이 안 나오는 주말이면 우린 자주 만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러곤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난 역전 근처에 아주 작은 슈퍼를 인수했다. 어느 날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날 찾아왔다. 손은 떨고 있었고 행동이 부자연스러웠고 말도 더듬었다. 그동안 그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아내는 동네 창피하다고 배달용 오토바이를 집 옆에 세워 놓는 걸 강하게 반대했고 바로 옆에 사는 장인·장모는 유명 대학 법대까지 나왔으면서 겨우 신문 배달을 하냐며 엄청 무시했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운도 없는 게 그의 운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결국 이혼하고 혼자 형네 집에서 생활했는데 형과 형수가 중병 든 동생 돌보는 걸 자기 일처럼 신경 쓸 수가 있었을까….

심신이 황폐해진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졌다. 그는 내게 매일 오다시피 했는데 밥도 못 먹고 와서 가게에서 우유와 빵으로 때우고는 했는데, 솔직히 좁은 가게에 매일 찾아오는 것도 내심 부담이 됐다. 하루는 눈치를 챘는지 가게 저만치서 서성이다 금방 사라졌다. 이름을 크게 불러봤지만, 그는 못 들은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땐 이미 정신까지 혼미해졌거나 치매 증상까지 온 게 아니었나 싶다. 파킨슨병에 걸리면 치매가 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날 찾아오곤 했을 때 내가 싫은 눈치를 준 것은 아닌지, 가게 저만치서 서성이던 그를 봤을 때 달려가서 붙잡을 걸 하는 후회도 들지만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참 그립고 너무 미안하다.

친구 김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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