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새는 고추의 매운맛 못느낀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1. 10.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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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해마다 노벨 과학상은 3일에 걸쳐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순서로 발표된다. 그런데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다. 올해 노벨상이 전형적인 예로 첫날 노벨생리의학상 업적인 온도수용체와 촉각수용체 발견에 대해서는 꽤 흥미를 보였지만 둘째 날 노벨물리학상은 지구과학 분야가 받았다는 점이 잠시 화제가 됐을 뿐 복잡계 연구라는 주제는 슬쩍 넘어갔다. 셋째 날 노벨화학상은 친환경 촉매 개발자들이 받았다는 정도로 그쳤다. ‘동아사이언스’ 사이트에서 검색해봐도 생리의학상 관련 기사가 여럿이고 자세히 다뤘다.

필자도 올해 생리의학상 수상자 발표를 접하며 약간 소름이 끼쳤다고 할까 아무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발표 3일 전인 지난 1일 고추 게놈 관련 취재를 하다가 온도수용체 얘기가 잠깐 나왔고 집에 오는 길에 현재 작업 중인 책에 이 내용을 어떻게 담을지 구상했기 때문이다.

1997년 온도수용체 TRPV1을 발견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데이비드 줄리어스 교수는 원래 통증 연구자였다. 그는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이 통증을 유발한다는데 착안해 통증수용체를 찾기로 했다. 캡사이신 분자라는 물리적인 실체를 이용하면 실험이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년 만에 수용체를 찾았다.

줄리어스 교수팀은 통증수용체 TRPV1으로 여러 실험을 하다가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주변 온도가 43℃를 넘으면 활성화돼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TRPV1은 단순한 통증수용체가 아니라 우리가 고통스럽게(적어도 불쾌하게) 느끼는 고온을 감지하는 온도수용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매운 걸 먹을 때 얼얼함과 함께 덥게 느끼며 땀을 흘리는 것도 캡사이신이 TRPV1을 건드린 결과이니 말이 된다.

2021년 노벨생리의학상은 온도수용체와 촉각수용체를 발견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 제공

고추가 새를 선택한 것

그런데 고추는 왜 캡사이신을 만들어 우리의 온도(통증)수용체를 자극할까. 이 질문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그럴듯한 답을 내놓았다. 포유류가 고추를 먹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대신 캡사이신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는 조류가 고추를 먹으면 배설물에 포함된 고추씨가 사방으로 뿌려져 자손을 잇는 전략이다. 새는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키고 장의 길이도 짧아 씨가 좀처럼 파괴되지 않는다. 

생태계 현장 조사 결과 이 가설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추의 원산지인 중미와 북미 남서부에 사는 새인 굽은부리쓰래셔(curve-billed thrasher. 지빠귀와 비슷하게 생긴 앵무과의 새)는 고추를 즐겨 먹는데 배설물을 조사해보니 온전한 고추씨가 들어있었고 그 결과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실제 발아율이 70%에 이르렀다. 반면 이 지역에 사는 소형 설치류인 숲쥐나 선인장쥐는 야생 고추를 외면하고 심지어 캡사이신이 없는 재배 품종 고추를 줘도 망설이며 조금밖에 먹지 않는다는 발견이 지난 2001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지난 1일 서울대 식물생산과학부 최도일 교수를 만나 고추 게놈 해독 관련 취재를 하다 고추와 토마토의 번식 전략 차이로 얘기가 넘어갔다. 최 교수는 토마토 게놈 해독 연구에 참여했고(2012년 결과 발표) 고추 게놈 해독 연구를 이끌었다(2014년 결과 발표). 둘 다 가짓과 식물로 서로 가까운 사이이지만 열매의 관점에서는 꽤 다르다. 

토마토(야생은 방울토마토보다도 작다)는 씨가 성숙하면 과육이 물러지고 당도가 올라가며 독성 물질도 사라져 포유류를 포함한 여러 동물이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반면 고추는 씨가 성숙해도 과육이 여전히 단단하고 캡사이신이 고농도로 존재해 포유류가 꺼린다. 대신 색이 붉게 바뀌며 주변 잎과 보색대비를 이뤄 총천연색을 볼 수 있는 새의 눈에 쉽게 띈다.

최 교수는 “토마토씨를 본 적이 있느냐?”며 고추씨보다 작은데다 미끌미끌한 젤에 싸여있어 포유류가 씹어 먹어도 거의 파괴되지 않고 장을 통과할 때도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대변에 섞여 온전하게 빠져나온다고 설명했다. 반면 고추씨는 상대적으로 크고 노출돼 있어 설치류 같은 작은 포유류가 씹어 먹게 되면 십중팔구 상처를 입고 장의 소화 작용으로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어떻게 담을까 고민하다가 고추 캡사이신 진화에 대한 약간의 통찰을 얻었다. 포유류와 조류는 거의 3억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따라서 둘의 TRPV1 역시 지난 3억 년 동안 각자 진화하며 구조도 꽤 달라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새는 체온이 포유류보다 4도 정도 높은 40~44℃이기 때문에 TRPV1이 활성화되는 온도도 그만큼 더 높아야 한다. 실제 조류의 TRPV1의 활성화 온도를 측정해보면 46~48℃로 그만큼 더 높다. 세팅 온도의 차이는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반면 토마토와 고추는 약 2000만 년 전에 공통 조상에서 갈라졌다. 고추의 조상이 이차대사물인 캡사이신을 발명한 역사는 2000년만 년이 채 안 된다는 말이다. 결국 고추 조상은 포유류로부터 씨앗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대신 열매 자체를 못 먹게 화학적으로 지키는 전략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포유류의 TRPV1에만 달라붙는 구조의 화합물인 캡사이신을 만드는 생합성 유전자 네트워크를 진화시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조류의 TRPV1은 포유류와 어디가 달라 캡사이신이 달라붙지 못하는 걸까.

○ 아미노산 하나만 바꿔도 달라붙어

고추의 원산지인 중미와 북미남서부에 서식하는 소형 포유류인 사막숲쥐(왼쪽)와 선인장쥐(가운데)는 매운맛 때문에 고추를 먹지 않는다. 반면 이 지역에 사는 굽은부리쓰래셔(오른쪽)은 캡사이신의 매운맛을 못 느끼기 때문에 고추를 먹고 씨를 퍼뜨리는 공생자다. 위키피디아 제공

지난 2013년 ‘네이처’에는 쥐의 TRPV1 구조를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TRPV1은 세포막을 가로지르는 이온통로 단백질이다. 저온에서는 통로가 닫혀 있지만 주위 온도가 43℃를 넘으면 구조가 바뀌면서 통로가 열려 칼슘이온이 세포 밖에서 세포 안으로 들어오며 신호를 전달한다. 그런데 캡사이신이 달라붙으면 43℃가 안 돼도(예를 들어 구강 온도는 36℃ 내외다) 구조가 바뀌어 통로가 열려 온도가 높다는 경고 신호를 보낸다. 오작동인 셈이다.

극저온전자현미경으로 TRPV1 구조를 분석한 결과 캡사이신이 달라붙었을 때 정말 통로가 열리는 상태로 바뀐다는 것을 확인했고 단백질에서 캡사이신이 달라붙는 부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쥐의 TRPV1은 아미노산 838개로 이뤄진 커다란 단백질로 나선 6개(S1~S6)가 세포막을 관통하며 박혀 있다. 

쥐의 경우 S4에 있는 550번째 아미노산 트레오닌(T550)과 S4와 S5를 연결하는 부분(S4-S5 linker)에 있는 570번째 아미노산 글루탐산(E570)이 캡사이신과 결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포유류도 단백질 크기가 약간 다를 뿐 두 자리의 아미노산 서열은 잘 보존돼 있다(예를 들어 사람은 T551과 E571). 그런데 닭의 TRPV1를 보면 쥐의 T550 자리인 558번째 아미노산이 알라닌(A558)이고 쥐의 E570자리인 578번째 아미노산이 알라닌(A578)이다. 다른 조류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캡사이신이 달라붙지 못한다.

그렇다면 닭의 TRPV1에서 위의 아미노산을 쥐의 것으로 바꿔치기하면 캡사이신이 달라붙을 수 있을까. 지난해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츠’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은 연구 결과가 실렸다. 578번째 아미노산인 알라닌(A) 대신 쥐의 해당 위치 아미노산인 글루탐산(E)으로 바꿔주자(A578E) 캡사이신이 잘 달라붙었다.

역으로 포유류의 TRPV1도 아미노산 하나만 바뀌면 캡사이신이 달라붙지 못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실제 쥐의 TRPV1에서 570번째 아미노산인 글루탐산(E) 대신 닭의 해당 위치 아미노산인 알라닌(A)으로 바꿔주자(E570A) 캡사이신 결합력이 뚝 떨어졌다. 그렇다면 지구 어딘가엔 이런 변이 TRPV1을 지녀 포유류임에도 고추를 잘 먹는 종이 존재하지 않을까.

고추는 성공했지만...

온도수용체 TRPV1은 막단백질로 막을 관통하는 나선인 S6가 통로의 벽을 이루고 있다(이온통로는 TRPV1 네 분자가 모인 복합체이지만 그림에서는 두 분자만 묘사했다). 고추를 먹으면 캡사이신 분자(CAP)가 S4 나선에 있는 아미노산 트레오닌(T551)과 상호작용하며(위 오른쪽) 이어서 S4-S5 연결 부분에 있는 아미노산 글루탐산(E571)과도 상호작용해(아래 오른쪽) S6을 끌어당겨 통로가 열리며 칼슘이온이 통과해(노란 점선 화살표) 신호가 발생한다(아래 왼쪽). 새의 TRPV1은 두 아미노산 모두 알라닌이라 캡사이신과 이런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 ‘네이처화학생물학’ 제공

남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에는 작은 포유류인 북부나무두더지가 서식한다. 수년 전 중국과학원 연구자들은 이 동물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연히 고추를 줘봤는데 한 번 맛보고 피하는 대신 잘 먹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북부나무두더지의 TRPV1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해 지금까지 알려진 포유류의 서열과 비교해 차이를 살펴봤다. 북북나무두더지의 TRPV1은 S4에서 캡사이신이 달라붙는 자리인 579번째 아미노산이 메티오닌(M579)인 반면, 비교한 포유류 22종은 모두 트레오닌(T)이었다(쥐의 경우 T550). 그 결과 캡사이신에 대한 민감도가 5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변화에도 온도수용체로서 기능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자리뿐 아니라 캡사이신 결합에 중요한 또 다른 자리까지 아미노산이 달라 캡사이신에 완전히 둔감해진 조류(닭은 A558과 A578)에는 못 미치지만, 이 변이로도 캡사이신에 꽤 둔감해져 고추를 먹을 때 우리가 싱거운 풋고추를 먹는 느낌 아니었을까.

그런데 동남아시아는 고추의 자생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북부나무두더지의 TRPV1 변이는 단순한 우연의 결과일까. 연구자들은 북부나무두더지와 서식지가 겹치는 후추속(屬) 식물 한 종(학명 Piper boehmeriaefolium)에 주목했다. 열매가 상당히 매운데도 불구하고 북부나무두더지가 즐겨 먹기 때문이다. 열매의 성분을 분석하자 캡사이신과 구조가 비슷한 분자가 발견됐고 이를 캡2(Cap2)라고 이름 지었다. 고추와는 독립적으로 비슷한 이차대사물을 만들었으니 ‘수렴진화’로 볼 수 있다.

캡2에 대한 민감도를 조사하자 북부나무두더지의 TRPV1은 쥐의 아미노산을 지닌 경우에 비해 민감도가 무려 1000분의 1로 떨어졌다. 새가 고추의 매운맛을 모르듯 사실상 이 열매에서 매운맛을 못 느낀다는 말이다.

수십만 년 전 어쩌면 수백만 년 전 살던 북부나무두더지 조상에서 유전자 돌연변이로 TRPV1의 579번째 아미노산이 트레오닌에서 메티오닌으로 바뀐 변이 단백질이 나왔고 우연히 부모 양쪽에서 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은 개체가 태어났을 것이다. 이 개체는 캡2에 대해 1000배나 둔감해졌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이 식물의 열매를 마음껏 먹었고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순간 종 전체에서 유전자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추의 캡사이신은 캡2와 구조가 비슷해 1000배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50배 정도 둔감해 북부나무두더지가 고추를 먹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수백만 년 전 중미에서 고추의 조상 식물이 캡사이신을 진화시킨 뒤 지금까지 함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숲쥐와 선인장쥐는 동남아의 북부나무두더지와는 달리 TRPV1 유전자에서 캡사이신을 무력화하는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못했고 그 결과 여전히 고추를 피하고 있다. 프랑스 유전학자 자크 모노의 저서 ‘우연과 필연’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북부나무두더지(왼쪽)와 후추속 식물 한 종(학명 Piper boehmeriaefolium. 이하 pb)은 분포지역이 겹친다(오른쪽 지도). 북부나무두더지(tree shrew)는 이 식물의 열매(piper)를 좋아하고 고추(chilli pepper)도 좀 먹지만 생쥐(mouse)는 둘 다 피한다. 한편 마늘(garlic)과 생강(ginger)은 둘 다 피한다. pb에는 캡사이신과 비슷한 분자(캡2)가 들어있지만 북부나무두더지는 캡2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게 진화해 pb를 먹이로 삼는 데 성공했다. 플로스 생물학 제공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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