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영화 제작자 이태원

김태훈 논설위원 2021. 10. 26.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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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고3 수험생이었던 필자는 모의고사 끝나는 날마다 친구들과 학교 근처 재개봉관에 몰려가곤 했다. 시험 스트레스 풀자며 가끔 야한 영화도 봤는데 배우들이 아무 맥락 없이 벗는 3류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안성기·이보희가 주연한 ‘어우동’은 달랐다. 스토리는 정교했고 배우 연기도 다른 영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이보희가 입은 한복이 눈부셨다. 우리 한복이 이렇게 예뻤나 싶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이가 1980년대 초 태흥영화사를 설립한 이태원이다.

/일러스트

▶그 시절 많은 한국 영화가 돈 되는 외국 영화 수입하기 위한 쿼터 충당용으로 날림 제작됐다. 공동묘지에서 시신이 누운 채로 날아다니는 공포영화도 봤는데, 시신 역할 배우가 입은 소복 안에 널찍한 송판이 두드러졌다. 그걸 피아노 줄로 연결해 배우를 들어 올리니 무섭기는커녕 황당했다. 이태원은 “이래선 안 된다”며 “제작비에 인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보희가 입은 한복만 해도 최고 전문가를 찾아내 만들었다. 총 제작비가 당시 평균의 두 배 넘게 들었다고 한다.

▶이태원의 영화 인생은 ‘성공은 실패가 없는 삶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1990년대 초 그가 제작한 ‘장군의 아들’ ‘서편제’는 역대 최다 관객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웠다. 하지만 1959년 제작자로서 첫 작품인 ‘유정천리’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한동안 영화를 떠났다가 1984년 돌아와 내놓은 ‘비구니’는 아예 촬영도 못 하고 제작비만 날렸다.

▶그는 한류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내다본 제작자였다.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를 들고 모스크바 영화제를 찾았다. 난생처음 참석한 국제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이 최우수 여자 연기자상을 받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씁쓸한 경험도 했다. “한국 영화에 관심 가져 달라”며 영화제 집행위원들을 식사에 초대했는데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에게 국제 무대에서 한국 영화의 위상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우리 영화의 세계화는 이태원 평생의 비원이었다. 마침내 2002년 ‘취화선’이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자 “월드컵 4강에 맞먹는 쾌거”라며 기뻐했다. 그가 초청한 식사 자리를 무시했던 외국 연예인들이 이젠 한국의 영화인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며 제 발로 찾아온다. 그 반전을 위해 누구보다 땀 흘렸던 ‘영화 제작자 이태원’이 그제 영면에 들었다. 한국 영화인들이 만들어갈 한류의 새바람을 하늘에서 응원하며 지켜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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