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똥만도 못한 정치? 그래도 알고 싶다

김윤철 2021. 10.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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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30년도 넘은 일이다. 대학교 1학년 정치학 전공 첫 수업 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누군가 답했다. “정치는 똥입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1학년이지만 대학 강의실에서 그것도 정치학도가 되겠다는 학생의 입에서 저리 ‘생생한’ 정의가 내려질 것이라고 생각지 못해 나온 반응이었으리라. 민주화 이후라는 지금은 어떨까? 똥을 욕보이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똥만도 못한 게 정치입니다”라는 답이 나오지 않겠냐는 것이다. 항간에서 정치를 ‘혐오산업’이라고 부르는 실정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것이다.

한 10년 전쯤부터 지자체를 비롯한 각급 기관들이 운영하는 각종 시민대학이 성행한다. 필자에게도 가끔 섭외가 들어와 강의를 하러 간다. 시민대학 강의 첫 시간 교수 소개를 할 때 필자가 꼭 던지는 물음이 있다. 수강생들은 필자가 정치학자라는 것을 이미 아는 터이기도 해서 정치학자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지만, 이내 곧 그냥 당신이 어서 답하라는 눈빛을 보낸다. 결국 필자가 금방 답한다. “정치에 학을 뗀 사람들이고, 정치학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공부”라고. 반응은 대체로 싱겁다. 그래도 말을 잇는다. “이제는 정치학자라고 소개 안 하고 교양학자라고 소개한다. 정치인들 미워하다가 이제는 정치학자도 미워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여전히 시큰둥한 가운데에도 연민의 눈빛을 보낸다.

정치학자도 미워한다는 말은 한낱 우스개가 아니다. 학교에서도 종종 다른 학과나 전공 교수 사이에서 “정치학자는 그렇겠죠”라는 빈정대는 투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정치학자도 정치인들처럼 인기를 얻거나 면피하기 위해 교활한 계산에 의거해 행동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억울하긴 해도 선거에 국한된 권력쟁탈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학이 횡행하는 정치권, 이들과 일정한 연줄을 배경으로 말을 보태는 정치평론가들, 또 주권자들의 개체성과 인격을 배제하고 지역 세대 이념 등의 변수로 처리하는 접근법과 민주주의를 선거의 주기적 반복 정도로 한정한 관점의 주류화 등을 감안하면 ‘이유 있는 편견’이다.

10년 전쯤인가는 교수들보다 정치인들이 소명의식이나 투명성이 더 높다고 했다가 “별 미친 소리를 다한다”는 식의 반응에 직면했던 적이 있다. 정치인들은 우리 사는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추한 사람들이라고 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지금은 필자가 나서서 그리 말해야 되지 않나 싶다. 작금의 대선 정치를 보면 특히 그렇다.

‘놈 놈 놈’ 간 섞임과 균형이
정치 본색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의도적 무지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를 알고 싶지 않게 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한참 분주하다. 그런데 정당과 정치인들 간의 쟁투 양상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민주화 이후 역대 최저’이다. 경쟁후보를 범죄자로 단정 짓고 자신이 대통령 되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식의 말을 서슴지 않는다. 주권자인 국민을 예능프로그램 시청자 정도로 취급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시대 상황에 대한 정의도, 목표와 행동규범도 하나같이 진부하고 표피적이다. 그러니 전략이 제시될 리 만무하다. 불공정한 현실과 청년세대 미래의 암울함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어떤 불공정이 특히 문제이고, 당장 누구의 어떤 고통을 우선 다루고 해결할지, 후순위로 밀려난 문제와 당사자들의 양해는 어떻게 구하고 그 대가는 어떻게 제공할지 등에 대해 아무런 해법이 없다.

정치파괴의 향연과 의도적 무지

가령 기후위기와 에너지 문제의 경우 이미 산업구조의 대격변을 요구하면서 엄청난 이해갈등을 예비 혹은 표출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탈원전을 둘러싼 거센 공방도 그 선상에 놓여 있다. 이런 대전환의 시대임에도 정치권 모두가 핵심 가치라고 내세우는 공정은 정시 비중 확대나 공채의 엄중한 관리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정해진 문제에 정해진 답을 내는 방식으로 대전환기의 지속성장은커녕 생존이 가능할지에 대해 냉철한 물음을 던져 따져볼 기회 공간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지 않다.

그런 중에도 모든 후보들(특히 양대 정당 후보들)이 자신을 영원한 정의의 사도로 규정하고, 상대방을 절멸시켜야 하는 불의의 상징으로 몰아간다. 정치가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들 간의 섞임과 힘의 균형과 타협’일 수밖에 없음에 대한 ‘의도적 무지’이다. 이에 기대어 열성지지층을 중심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편견을 동원하면서 정치를 독점하고 파괴한다. 지지정당이 없거나 일체감이 약한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정치를 알고 싶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해결되는 게 없이 갈등만 키우기 때문이다.

정치의 독점과 파괴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낳는 영향이다. 선거에서 공약집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 즉 고용과 소득, 주거와 교육과 건강 같은 삶의 기본 문제들이 모두 개인과 당사자들의 감당해야 할 몫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도, 공동체의 위기도 살필 여력이 없다. 단지 바빠지는 게 아니다. 사회가 기본으로 해결해줘야 할 그 문제를 둘러싸고 강자와 약자의 격차가 회복불능의 수준으로 벌어진다. 타인은 이제 갑이거나 을이고,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존재가 된다.

필자의 수업 중 학생들이 스스로 주제를 택해 시민에 관한 논의와 실천을 학습하는 게 있는데, 정치 분야를 별도로 설정하면 열에 아홉의 경우 선택하는 학생이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정치 그 자체-혹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를 공부하는 다른 수업에는 무척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요새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왜 다들 나쁘다고 욕하는 정치를 공부하느냐고 묻는다. 답변은 “정치를 너무 몰라 알고 싶어서”이다. 청년 대학생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단지 시민적 삶과 정치가 연관-연계-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변화가 일었다
새 가능성의 정치를
청년들이 알고 싶어 한다
노회찬정신에 주목한
MZ세대들과 함께
알고 싶은 정치란 이름의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대부분 중등교육 과정에서 헌법과 정치에 대해 학습한 적도 없고, 기회를 제공받은 적도 없다. 그래서 자신들의 헌법적 지위가 잠재적 대통령(주권자)이며, 시민적 권리와 책임의 수행이 다양한 차원과 방식의 정치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의도 정치’로 불리고 기성 정치권이 목숨을 걸고 매달려있는 선거게임의 효과에 의문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나의 삶이 달라지는 걸 목격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가 일었다. ‘586세대의 청년세대 약탈론’ 유행 이후 벌어진 일이다. 동의나 긍정·부정 평가 여부를 떠나 어쨌든 새로운 현상이다. 청년세대 스스로 이미 존재했던 청년 정당과 정치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좋은 정치의 상을 찾기 시작했다. 정치가 알고 싶어진 것이다.

현재 넘어 미래의 그들을 그려보려

얼마 전 필자에게 연세대의 ‘연세춘추’와 경희대의 ‘대학주보’에서 인터뷰와 원고 요청이 들어와 응한 적이 있다. 연세춘추는 노회찬 6411정신에 대한 것이었고, 대학주보는 청년세대의 정당활동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두 청년매체의 기획은 그들이 알고 싶은 정치의 상에 대한 힌트를 준다.

첫째, 자영업자 몇%에게 얼마만큼의 보상이 이루어졌다와 같은 식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을 추상화된 총량적 수치로 환산하는 식의 정치가 아닌 정치를 알고 싶어 한다. 노회찬은 6411번 새벽 첫차의 주 승객인 노동약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으나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아줌마나 환경미화원 등으로 불리는 삶의 소외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개체성이 존중받고 인격화된 존재로 대우받는 정치에 대한 지향이다.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청년들이 유독 노회찬 6411정신에 주목한 이유다.

둘째, 기성 정당에서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할 증대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기성 정치의 한계와 장애물 돌파의 의지에 불을 지핀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의 정치 ‘조직과 질서’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이들이 정치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흐릿하나마 자신들의 지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 사회 전반에 걸쳐 알고 싶은 정치를 논해야 할 이유다.

필자도 앞으로 이들이 알고 싶어 하는 정치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의 소외된 삶을 나아지게 만든다는 정치의 가능성을 다시금 모색해보고자 한다. 그들 스스로가 관여하고 주도하는 정치의 가능성도 함께. 청년세대들이 새로운 정치의 조직과 질서를 창출하려는 시도들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음성과 움직임을 직접 만나 듣고 보면서. 지금 여기의 경계를 벗어나 ‘과거와 미래의 그들’을 그려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알고 싶은 정치’라는 이름의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 및 실천교육센터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

김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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