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참!]'토지공개념의 추억' 현실에서 되살리자
[경향신문]
“얼굴 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다.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는 대지의 일부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일과 다름없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일어난다.”
이 인용문은 1854년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자신을 찾아온 미국정부 관리에게 한 연설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얼굴 흰 추장’은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은 들소가 많은 목초지대 땅을 빼앗고 인디언을 살기 힘든 ‘보호구역’으로 몰아넣는 중이었다. 인디언의 먹을거리를 없애려고 들소도 멸종위기에 이르도록 마구 죽였다. 시애틀은 그를 기린 지명이었으나, 막상 시애틀시에서는 인디언이 거주할 수 없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토지는 소유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라는 토지공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뿌리가 깊다. <시경>에 나오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왕토사상도 토지공개념에 맥이 닿는다. 왕의 상징적 소유를 통해 땅은 백성 모두가 함께 이용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영연방 국가에는 99년 등 한시적 토지소유 개념이 있는 데가 많다. 99년이 경과해도 반환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1% 보유과세’에 그 정신이 살아있다. 땅을 이용하지 못해 현물납을 한다고 가정하면 100년 되는 해에는 토지가 전부 국가에 귀속되는 셈이다.
전래의 토지공개념을 대폭 후퇴시킨 게 신대륙을 무단점유한 미국이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은 대지주였다.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은 “모든 계급에 열려 있는 영국 선거제가 지주의 재산권을 불안하게 한다”며 소유권 절대 사상을 헌법에 주입했다. 공개념을 도입했던 우리 제헌헌법이 후퇴한 것은 미국을 ‘국가표준’으로 믿는 기득권층이 한국 사회를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토지공개념이 빛을 본 것은 노태우 대통령 때였다. 땅값과 집값이 폭등하고 셋집에서 쫓겨난 일가족이 자살하는 등 부동산 투기 폐해가 극심해지자 1989년 택지소유상한법, 토지초과이득세법, 개발이익환수법이 제정된다. 개발연대부터 치솟기만 하던 땅값은 1990년대 중반 처음으로 보합세와 내림세를 보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라는 빌미가 생기자 1998년 헌법재판소가 공개념 관련법에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경제 살리기’ 논리와 헌재의 보수 성향이 ‘세계 최고 투기공화국’에 꼭 필요한 제도들을 몰살해버린 것이다. 건설부·재무부 출입기자 중에서 유일하게 토지공개념법 제정을 적극 옹호했던 나로서는 쓰라린 추억이다. 펄 벅이 한 작품에서 썼던 것처럼, 경제위기에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는 줄 알았는데 지내고 보니 승자는 대기업가와 지주이고 패자는 노동계급과 중류층이라는 사실을 다시 목격한 것이다.
대장동 개발 관련 국회 국정감사와 정부의 대응, 그리고 언론의 보도 태도를 보면 한국 사회는 문제해결 능력을 상실한 듯하다. 개발정보를 이용한 LH 직원 투기, 토건족과 검찰·언론 등 핵심 개혁대상이 공익을 사유화한 부산 LCT와 대장동 개발 사건의 근원적 치유책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수억, 수백억원 이익이 나는 투기판을 방치하면 전 국민이 너나없이 투기에 나서게 돼있다. 근본 해결책은 개혁정권이 들어서서 토지공개념을 제도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보유세, 양도차익과세, 분양가상한제, 재건축부담금을 강화하고 토지임대부 공영주택을 공급하는 정책 등을 공개념의 일환으로 실천해야 한다.
공영개발을 반대해온 보수 야당과 언론까지 정쟁의 일환이지만 이재명 후보에게 개발이익을 왜 더 환수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는 판이니 개발이익환수제 강화도 뜻밖의 기회를 맞았다. 이 제도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따르면 ‘강화해야 한다’가 49.7%로, ‘신중해야 한다’ 37.9%를 앞질렀다.
현행 헌법에도 토지공개념의 취지를 살린 조항이 많다.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고(35조 ③항),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해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122조). 투기공화국을 방치하는 지금의 현실이 헌법불합치 상태다.
이봉수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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