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죽음', 관계 회복 기회를 걷어찬 한국

이제훈 2021. 10. 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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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14
북한 주민에게 위로를 전하고 '특수관계인'의 방북 조문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17년 전 '김일성 사망' 뒤 김영삼 정부의 대응에 비춰 진일보했다. '김정일 사망'을 '반북 선동'의 불쏘시개로 악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부 차원의 조전 발표나 조문단 파견은 거부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의 대응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기 어렵다.
2011년 12월26일 평양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인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겸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해 이희호 이사장은 “깊은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고, 김 부위원장은 “깊은 사의를 표하셨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이 이사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민간 조문단은 김정은을 만난 첫 남쪽 인사다. 연합뉴스

1994년 7월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이 놓쳐버린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의 기회는 ‘인간 김영삼’이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기고 싶어 한 숙적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2000년 6월에야 현실이 됐다. 1994년 7월~2000년 6월, 그 여섯해의 세월 동안 날려버린 화해와 협력과 평화의 기회가 어떤 것일지 그게 얼마만큼 소중했을지 우리는 아직도 가늠하지 못한다.

1994년 한반도를 적대와 광기의 수렁에 밀어 넣은 ‘조문 논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그럴 리가. 예상치 못한 ‘김일성의 죽음’을 남과 북의 오랜 적의를 눅이고 화해의 정화수로 쓸 길은 열려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애써 그 길을 가지 않았을 뿐이다.

예컨대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선택은 김영삼과 전혀 달랐다. 북한한테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북은 오랜 세월 대한민국 정부를 “식민지 괴뢰”라고 멸칭했는데, 이는 자기네 ‘주적’이 “승냥이 미제”라는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또한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껏 북을 ‘봉쇄’ 수준으로 고립시키며 공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아왔다. 그런 미국의 대통령이 ‘김일성의 죽음’에 맞닥뜨려 공식 ‘조문 성명’을 발표하고,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의 조문을 승인했다. 이를 두고 클린턴 행정부 내부 논의에 참여한 한 인사는 “미국 정부가 사소한 것으로 (북한에) 크게 생색을 낼 수 있는 기회”라고 짚었다고 로버트 갈루치는 <북핵 위기의 전말>에 밝혔다.

<노동신문>은 1994년 7월11일치 3면에 클린턴 대통령의 “조문 성명” 전문을 실었다. 내용은 이렇다. “나는 미국 인민들의 이름으로 김일성 주석의 서거에 즈음하여 북조선 인민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조의를 표시합니다. 우리는 두 정부 사이의 회담 재개를 위한 김일성 주석의 영도력을 평가합니다. 우리는 회담이 적절하게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조전보다 격이 낮은 ‘성명’ 형식을 취하고, ‘조의’의 대상을 북한 당국이 아닌 “북조선 인민”으로 한정해 정치외교적 논란을 최대한 회피하며 ‘김일성의 죽음’ 탓에 ‘1차 북핵 위기’ 해소를 목표로 한 북-미 고위급회담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정책 의제’를 밝힌 것이다. 북-미 고위급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당시 국무부 차관보는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조문했다. 클린턴 정부의 바람대로 1994년 8월5~12일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이 열려 ‘4개 항 합의문’이라는 결실을 거뒀다.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돌발 악재를 ‘1차 북핵위기’를 봉인할 ‘제네바 기본합의’(1994년 10월21일)로 가는 길을 열 디딤돌로 삼은 것이다.

클린턴이라고 국내 정치적 반발에 시달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미국의 야당인 공화당은 클린턴이 한국전 참전용사와 그 가족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며 맹비난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상원의원, 그것이 외교요”라는 제목의 사설로 공화당 원내대표의 ‘조문 반대’를 비판했다.

조문은 개인에겐 ‘사람의 도리’(인륜)의 문제일 수 있지만, 국가에는 ‘외교’다. 국제사회에 ‘조문 외교’라는 개념이 있는 까닭이며, ‘적한테도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외교적 행위’라 불리는 까닭이다. 갑작스러운 ‘김일성의 죽음’에 맞닥뜨려 클린턴은 ‘외교’를 했고, 김영삼은 ‘정치’를 했다. 그 차이가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의 행로를 갈랐다.

‘김일성의 죽음’을 외교의 기회로 삼은 국가가 클린턴의 미국만은 아니다. 북이 지금도 “철천지원수”라고 비난하는 일본도 ‘조문 외교’에 적극 나섰다. 당시 일본 총리인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내각 수반이 아닌 사회당 위원장 자격으로 조전을 보냈고, 연립정부의 세 축인 사회당과 자민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은 모두 당대표 이름으로 조전을 보냈다. 일본은 3당 공동 조문단을 평양에 보내겠다고 했으나, 북이 “외국의 조의대표단은 받지 않기로 한다”는 공식 방침을 내세워 거절했다.

외국인 미국·일본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대한민국은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과연 그럴까? 바로 옆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유중국”(대만)은 남-북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국공)내전’과 ‘분단’을 겪었지만 1975년 장제스 총통, 1976년 마오쩌둥 주석의 죽음 때 서로 ‘조의’를 표했다. 전쟁 중에도 ‘외교’는 멈추지 않는 법이다. 그래야 평화와 공존의 길이 막히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4년의 ‘조문 파동’에서 교훈을 얻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100(2011)년 12월17일 8시30분에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시었다.” 2011년 12월19일 정오 <조선중앙텔레비전> 등 북한 매체의 ‘중대 보도’로 일제히 발표된 “전체 당원과 인민군 장병과 인민에게 고함”의 알짬이다. 함께 발표된 “김정일 동지의 질병과 서거 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는 “17일 달리는 야전열차 안에서 중증 급성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한 심장성 쇼크가 합병됐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두 “영원한 수령”이자 부자 사이인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인은 같다.

이명박 정부는 북의 ‘김정일 사망’ 발표 다음날 대응 방침을 밝혔다. 첫째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 둘째 “북한에 정부 차원의 조문단은 보내지 않기로 했다”, 셋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유족에 대하여 북측의 조문에 대한 답례로 방북 조문을 허용할 방침이다”, 넷째 “북한이 조속히 안정을 되찾아 남북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외교안보장관 회의를 한 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발표한 ‘정부 담화문’의 뼈대다.

북한 주민에게 위로를 전하고 ‘특수관계인’의 방북 조문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17년 전 ‘김일성 사망’ 뒤 김영삼 정부의 대응에 비춰 진일보했다. ‘김정일 사망’을 ‘반북 선동’의 불쏘시개로 악용하지도 않았다. 류우익 장관이 밝힌 대로 “12월23일로 예정했던 전방 지역에서의 성탄트리 점등을 금년에는 유보하도록 교계에 권유”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부 차원의 조전 발표나 조문단 파견은 거부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의 대응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의 이런 ‘절충적 선택’은, 17년 전 클린턴 미국 행정부가 ‘김일성 사망’ 직후 ‘대통령 조문 성명’을 발표하고 북-미 고위급 대표단의 북한대사관 조문이라는 ‘조문 외교’를 펼친 선례에도 미치지 못한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북쪽이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으로 이뤄진 고위급 공식 조문단을 남쪽에 파견한 사실과도 비교된다. 김기남 비서와 김양건 부장은 방남 기간 이명박 대통령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남북 고위급 대화의 물꼬가 트인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의 죽음’을 남과 북의 화해와 당국 관계 개선의 마중물로 활용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2011년 12월25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온 겨레는 이번에 남조선 당국의 도덕적 한계뿐 아니라 북남관계 개선에 대한 진정성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당국 차원 조전·조문단 등 전향적 조처를 에둘러 요청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조문(2011년 12월26~27일)을 허용하면서도 당국 차원의 조전 발표나 조문단 파견은 끝내 거부했다. 이듬해, 그러니까 이명박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12년 남북 당국 회담은 단 한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김정일 사망’ 발표 당일(2011년 12월19일) 리얼미터 조사에선 정부의 공식 애도 표명 찬성이 49.6%(반대는 31.4%)였고, 하루 뒤인 12월20일 <중앙일보> 조사에선 ‘정부가 북한 당국에 조의를 표하는 것’에 65.4%가 찬성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뒤 격심한 ‘조문 파동’에서 더 크고 깊은 교훈을 얻은 쪽은 “국민 정서 고려”를 입에 달고 살던 이명박 정부보다 ‘2011년 12월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훈|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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