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물 유포 안 했다고 왜 감형?"..사법부 자성하고 연구한다

임재우 2021. 10. 2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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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연구모임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 토론회
사법부가 가해자에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자성 나와
판결시 양형사유 많고 '그루밍' 범죄 이해 부족도 지적
법원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회장 오경미 대법관)가 지난 22일 저녁 ‘디지털 환경과 성범죄의 진화 - 디지털성범죄와 성매매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창립기념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13명의 판사와 5명의 활동가, 4명의 학자와 2명의 검사. 합쳐 24명이 10월의 ‘불금’에 모였다. 지난 22일 저녁 ‘디지털성범죄와 성매매’를 주제로 진행한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회장 오경미 대법관) 창립기념 공개토론회에 발제자나 토론자로 참석하기 위해서다. 4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줌(ZOOM)을 통해 이날 토론회를 지켜봤다. 연구회 소속 한 판사는 “법원 주최로 디지털성범죄·성매매 이슈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날 토론회는 성범죄에 대한 이해 부족과 뒤떨어진 젠더감수성으로 비판받아온 법원이 문제의식을 넓히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자리였다. 연구회는 디지털성범죄 등 진화하는 성범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낀 판사들을 중심으로 올 2월 꾸려졌다. 이후 8달가량 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이를 주제로 외부 자문위원들과 세미나 등을 진행하며 연구를 거듭해왔다.

“유포 안 했다” “피해자단체 후원”이 감형 사유?

이날 토론회에서는 그간 법원이 디지털성범죄·성매매 문제에 이해가 부족하거나 가해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자기반성이 이어졌다. 특히 ‘디지털성범죄의 양형상 문제’를 주제로 발표한 박기쁨 판사(사법정책연구원)는 법원이 성범죄 재판에서 감경요소나 집행유예 사유 등으로 고려해온 사유들의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무엇보다 감형의 요소가 많다. 현행 양형기준은 ‘성착취물을 유포하기 전에 삭제·폐기하거나 유포된 성착취물을 상당한 비용을 들여 자발적으로 회수한 경우’ 이를 특별양형인자 중 감경요소로 고려한다. 박 판사는 “(유포 여부를 판단할 때) 피고인의 말에 사실상 의존해야 하는 허점이 존재하고, 이미 유포된 영상을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데도 비용을 들여 삭제했다는 자료만 제출하면 감형이 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

법원이 ‘(불법촬영 영상을) 유포하지 않은 점’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사유로 드는 것도 법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박 판사는 “성범죄 처벌법에 따르면 촬영하는 범죄와 유포하는 행위는 엄연히 다른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그런데 법원에서 (불법촬영물을) 유포하지 않았다고 유리한 양형사유로 기재하는 것은 별도의 범죄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감형하는 것으로 매우 부적절하다”고 짚었다. 사체유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 살인죄를 감형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란 얘기다.

가해·범죄자가 피해자지원단체를 후원한다는 이유로 감형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박 판사는 이를 “돈으로 감형을 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판사는 “성범죄 피해자지원단체들이 감형 목적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공론화한 후에도 후원이 ‘감형 전략 패키지의 하나’로 취급되는 것은 무엇보다 법원이 여러 선처를 해 낮은 형을 선고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법원, ‘그루밍’ 이해 여전히 부족”

박수현 서울서부지법 판사는 최근 수차례 판례에 등장하고 있는 ‘그루밍’(성착취를 목적으로 특정인에게 접근해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행위)에 대한 법원 내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박 판사는 ‘그루밍’ 행위가 ‘유형력 모델’을 뼈대로 하는 현행법의 성범죄 유형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짚었다. ‘유형력’ 모델은 가해자가 폭행·협박 등 유형력을 행사해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성적 침해가 일어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반면, 그루밍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접촉이 대화나 온라인 채팅 등으로 일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형태여서 ‘유형력의 행사’로 여길 부분이 거의 없을 수 있다. 박 판사는 그루밍이 이처럼 ‘비정형적’이어서 일반 성범죄와 비교해 ‘증거와 맥락’을 파악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짚었다.

박 판사는 “비정형적인 그루밍의 정의를 어떤 공식처럼 이용해서 ‘이러한 요소가 없으니 그루밍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위험하다며,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판결을 예시로 들었다. 그루밍이 성립하는 몇 가지 도식들을 전제한 뒤 ‘전문직 성인 여성이 한 달 사이에 그루밍에 이를 수 없다’며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한 이 판결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관계 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박 판사는 법원에서 그루밍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증거를 단절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몇 개의 대화를 취사선택하여 제출한다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전체 대화 내역을 제출받아 살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날 토론회에 또 다른 키워드는 ‘성매매’였다. 연구회 소속 한 판사는 “성범죄와 성매매 모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대상화하는 면에서 동일하다. 이번 토론회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성매매를 관대하게 대해 성범죄를 위한 토양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짚었다.

조정민 부산지법 판사는 현행법상 형사처벌 대상(가해자)인 동시에 법률상 보호대상(피해자)도 될 수 있는 ‘성매매 영역 여성’들의 애매한 지위를 지적했다. 조 판사는 “과거에는 성매매 아동·청소년을 ‘대상 청소년’으로 규정해 보호 처분을 했지만, 최근에 법이 개정돼 성매매 피해 청소년으로 규정이 바뀌었다”며 “성인의 경우에도 이러한 변화를 한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짚었다.

“판사들의 작은 관심이 세상을 바꾼다” 활동가의 당부

마지막 토론자였던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판사들의 작은 관심”을 당부했다. 조 대표는 십여년 전 돈을 먼저 받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중간에 빠져나왔다는 이유로 업주로부터 사기죄로 고소당한 여성을 지원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조 대표는 당시가 “(업주가 여성들을) 사기죄로 고소해놓으면 차용증을 근거로 경찰이 여성들을 직접 잡아다 조사했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맡은 판사가 조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판사는 “이 여성이 얼마나 일했고, 술 한 병이 얼마고, 안주가 얼마고, 생활비가 얼마인지” 자세하게 물은 뒤, 조 대표에게 이를 정리해 의견서로 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판사의 요구대로 술값과 생활비 등을 계산해본 결과 유흥업소에서 일하면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결과적으로 이 여성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조 대표는 “이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된 뒤, 경찰에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을 상대로 들어온 사기 고소장은 받지 말라는 지침이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조 대표는 법원이 이처럼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그때 판사님의 전화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미처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판사들이 오늘처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인다면, 설령 그게 작은 관심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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