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황궁의 애국가와 오스트리아 국가

2021. 10. 2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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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어떤 위대한 왕실도 합스부르크 왕조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광대한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경우는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127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거의 65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북부를 포함하여 유럽의 상당부분을 지배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귀족적 기품이 흐르는 우아한 도시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궁 호프부르크 입구.

우리나라는 오스트리아와 1892년에 수교를 맺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오늘날처럼 인구가 900만도 안되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조가 주도하는 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고 당시 황제는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였다.

이 거대한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해 1918년에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오스트리아는 오늘날처럼 바다없는 작은 내륙국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오스트리아는 1인당 GDP가 5만 달러가 넘는 매우 부유한 선진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내년 2022년은 대한민국-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깊은 해를 1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영국에서 열린 G7 정상회담 일정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를 국빈 방문했다. 양국이 수교한 이래로 우리나라 정상이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Alexander van der Bellen) 오스트리아 대통령 내외는 호프부르크(Hofburg)에서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맞았다.

공식 환영식이 열린 호프부르크는 바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궁이었다. 이 황궁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방대한 ‘궁전 단지’가 되었는데 워낙 광대해 2000개가 넘는 방이 있을 정도이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 공식 환영식이 거행된 중정. 왼쪽에 황제 프란츠 2세 기념상이 보인다.(사진=청와대)

건축양식은 합스부르크 역사와 함께 고딕에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외관은 전체적으로 대부분 바로크 양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현재의 황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을 전시한 박물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의 방 등 지난날의 영광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또 황궁의 일부는 현재 오스트리아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환영식이 거행된 호프부르크의 중정에는 황제 프란츠 2세(1768~1735)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이 중정에서 태극기와 오스트리아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군악대는 애국가와 오스트리아 국가를 연주했다. 그러니까 호프부르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 애국가가 울려 퍼졌던 셈이다.

4분의 4박자로 된 우리나라 애국가는 근엄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반면 4분의 3박자로 된 오스트리아 국가는 알프스 산맥의 맑은 물처럼 청량감이 느껴지는 예식적인 곡이다. 오스트리아 국가의 악보를 보면 작곡자는 모차르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이것을 오스트리아의 국가로 작곡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은 <프리메이슨 칸타타 KV623>인데 그는 이 곡을 작곡한지 19일 후인 1791년 12월 5일에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국가의 선율은 바로 이 <프리메이슨 칸타타 KV623>의 일부를 차용하여 편곡한 것이다.

황제 프란츠 2세의 기념상. 하이든은 그에게 ‘황제찬가’를 바쳤다.

그런데 오늘날 학자들에 의하면 이 곡은 프리메이슨의 멤버 요한 홀처가 단독으로 작곡했거나 또는 모차르트와 공동으로 작곡했거나 또는 파울 브라니츠키가 작곡했을 것이라고 한다.

브라니츠키는 모차르트와 동갑으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칭송했던 유능한 음악가였다. 

어쨌든 이 곡이 오스트리아 공식국가의 선율로 채택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이었고 1947년에는 크로아티아계 오스트리아 여류시인 파울라 프레라도비치의 시가 가사로 선정되었다. 
 
그럼 그 이전의 오스트리아 국가는 어땠을까? 다름 아닌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의 곡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이든이 1797년에 작곡하여 당시의 황제 프란츠 2세에게 바쳤던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 주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였다. 보수적이었던 프란츠 2세는 자유주의를 탄압했지만 예술과 과학을 후원한 황제였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된 다음인 1928년부터는 가사를 바꾸어 황제를 찬양하는 대신 오스트리아의 풍광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이 국가는 1938년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직전까지 불려졌다.

그런데 하이든의 ‘황제찬가’는 거의 100년 동안 독일의 국가로도 사용되고 있다. 1841년 당시 독일 민족주의 시인 팔러슬레벤은 하이든의 곡에 게르만 민족주의를 찬양하는 가사를 붙였는데 이것이 1922년에 독일의 국가로 채택되어 나치독일이 패망하던 1945년까지 불려졌다. 그 후 1952년에 서독의 국가가 되면서 가사는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1, 2절은 제외하고 3절만 채택했고 독일이 통일된 다음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곡은 개신교에서는 ‘시온성과 같은 교회’라는 제목의 찬송가로도 불려진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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