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선비의 상징.. 동양선 산야에 묻힌 隱者·서양선 추모의 꽃

기자 2021. 10. 2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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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니컬 매거진’(1796)에 수록된 크리산세멈 인디쿰.
클로드 모네가 그린 국화(1897).

■ 박원순의 지식카페 - ⑧ 국화

3500년전 中 상나라때 식용·약용으로 처음 재배… 韓·中은 사군자로 日선 천황의 紋章으로 사용돼

모네·몬드리안·푸치니 등 미술·음악으로 표현… 상추·코스모스 등 국화과만 모두 2만3000종 달해

행복하려면 국화를 기르라는 말이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수목원에도 국화를 아주 좋아하는 직원분이 있는데 늘 즐겁게 일하며, 가을이면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국화 화분을 동료들에게 나눠준다. 미국 롱우드가든에서 일할 때도 국화를 담당하는 가드너와 함께 수개월 동안 국화를 재배했는데, 늘 웃는 모습으로 활기차게 일하며 동료들을 챙기는 그의 살뜰한 마음이 아직도 진한 향기로 가슴에 남아 있다. 국화 전시를 멋지게 마무리하고 나면 함께 고생한 가드너가 모두 모여 국화 꽃잎으로 만든 샐러드와 차를 즐기며 온정 넘치는 시간을 가졌다.

국화는 거의 모든 꽃이 시들어가는 11월에 정원을 밝히는 주인공이다. 이 시기에 국화보다 더 인상적인 꽃은 드물다. 8월 말부터 이미 꽃 시장에는 국화가 등장해 가을을 예고하고 가드너들은 여름 꽃의 화려함이 저물어 가는 정원에 마지막 불씨를 살리듯 국화를 심는다.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나무들을 배경으로 볏짚과 그래스류, 호박 같은 가을 소재들이 노란색·자주색·붉은색·분홍색·주황색 국화와 함께 가을의 깊은 정취를 자아내면 황혼의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 완성된다.

국화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역사가 깊다. 특히 중국의 영향이 큰데, 재배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인 상나라(기원전 약 1600∼1046)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국화는 노란색 작은 꽃들을 가진 모습이었고, 관상용 식물이라기보다는 주로 식용과 약용을 위한 허브였다. 뿌리를 달여 두통 치료에 쓰거나, 꽃잎과 어린싹은 샐러드로 식용하고, 잎은 차로 우려 마셨다.

중국 최초의 약초 의학서로 365종류의 약초에 대한 내용이 수록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는 몸을 가볍게 하고 머리와 눈을 맑게 하는 국화가 수명을 연장시키는 가장 좋은 영약이라 했다. 후한(後漢·25∼220) 시대에는 1년 중 홀수가 2번 겹쳐 복이 들어오는 날인음력 9월 9일(중양절)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전통이 생겨나기도 했다.

국화는 보다 고차원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진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은 국화를 상하걸(霜下傑), 즉 서리 속에서도 절개를 잃지 않는 호걸이라 칭송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산야에 묻혀 지낸 시인이자 은자(隱者) 도연명에게 국화는 은일(隱逸)과 절조(節操)의 상징이었다.

북송(北宋·960∼1127) 시대에는 대대적으로 여러 품종이 등장했다. 수도였던 개봉(開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 전체가 국화로 가득했다. 명대(明代·1368∼1644)에 사군자 개념이 등장하면서 국화는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유교 문화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겨울을 상징하는 매화, 봄을 상징하는 난초, 여름을 상징하는 대나무에 이어 국화는 쓸쓸하고 황폐한 가을의 깊고 요묘한 도의 경지에 이른 군자에 비유됐다.

국화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재배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중국 남송 시대의 정치가이자 식물 애호가였던 범성대(范成大·1126∼1193)가 국화에 대해 저술한 ‘범촌국보(范村菊譜)’나 유몽(劉蒙)의 ‘국보(菊譜)’에 따르면, 옥매(玉梅) 또는 능국(陵菊)이라고 불렸던 신라국이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국화가 재배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1712)’에도 서기 385년 백제의 국화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화는 고려 시대에 이르러 모란과 함께 궁궐을 장식하는 대표 꽃으로 사용됐는데, 의종(재위 1146∼1170)은 궁궐 정원에 신하들을 초대해 국화를 감상했다. 조선 초기 강희안(姜希顔·1419∼1464)이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1294∼1339) 때 원나라로부터 여러 진기한 국화 품종이 많이 도입됐다.

고려 시대 국화가 주로 화려함의 상징이었다면 유교의 영향을 받은 조선 시대에는 소박한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강했다. 양산보(梁山甫·1503∼1557)의 소쇄원에도 국화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의 절친 하서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 48영 중 제27영에서 국화는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진다. 이황(李滉·1502∼1571)은 도산서원 동편 산밑에 절우사(節友社)라는 이름의 단을 조성하고 매화와 대나무, 그리고 소나무와 국화를 심었다. 이황의 정원은 이후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영방이 1613년 경북 영양 서석지의 주일재 앞 연못가에 조성한 사우단(四友壇)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국화는 군자에 비유되면서 사람처럼 벼슬을 부여받기도 하고 귀한 손님이나 벗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국화꽃에 오상처사(傲霜處士)라는 벼슬을 내렸다. 조선 후기 이정보(李鼎輔·1693∼1766) 역시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로 표현하며 서리가 내리는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도 절개와 품격을 지닌 선비에 비유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 사랑채는 문화 교류 등 공적 성격이 강한 공간이었는데 마당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국화를 심은 화분들이 있었다. 담장 옆에도 작은 화오를 만들어 국화를 심었다.

조선 초기에 강희안의 ‘양화소록’이 있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유박(柳璞·1730∼1787)의 ‘화암수록(花庵隨錄)’이 있었다. 유박 역시 강희안 못지않게 뛰어난 원예 전문가였다. 이 책의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서 국화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 연꽃과 함께 일품을 차지해 높고 뛰어난 운치가 있는 꽃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수십 가지 모양과 색깔의 국화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으나 그중 노란색 국화가 오행(五行) 중 토(土)에 해당하는 금빛을 띤다 해 가장 귀하게 여겨졌다. 정조(재위 1776∼1800)는 규장각 검서관을 선발할 때 “국화에는 황국이 있다”는 제목의 시를 짓게 해 오방색(五方色)의 중심인 황색과 같은 중정(中正)의 뜻을 가진 인재를 가려내고자 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젊은 시절 한양 죽란서옥에서 벗들과 함께 종종 시주(詩酒) 모임을 했는데 밤중에 등불을 켜 놓고 벽에 비치는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는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도 다산초당의 화계에서 국화를 길렀다.

한편 일본은 8세기 무렵인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국화가 중요하게 인식됐다.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1180∼1239)은 16장의 꽃잎을 가진 국화를 문장(紋章)으로 사용했는데, 이후 이것이 황실을 상징하는 가문(家紋)이 됐다. 에도 시대(1603∼1868)에는 국화의 품종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기모노·식기·가구 등 일상생활의 물건에도 국화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이 널리 사용됐다.

국화가 유럽에 도입된 것은 17세기다. 주로 죽음을 상징해 장례식에 사용되고 무덤에 놓여졌다. 특히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에서 거의 추모의 꽃으로만 쓰였다. 폴란드에서는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고인들을 추모하며 무덤에 국화를 놨다. 1753년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는 국화의 속명으로 크리산세멈(Chrysanthemum)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금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리오스(chryos)와 꽃을 뜻하는 안테몬(anthemon)이 합쳐진 말로, 노란색 국화의 특징을 잘 묘사하는 이름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국화는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세기 후반 클로드 모네, 귀스타브 카유보트 등 인상파 화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 중 하나였다. 추상화의 선구자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의 초기 작품들 속에서도 국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국화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1890년 ‘국화(Crisantemi)’라는 타이틀로 현악 사중주를 위한 엘레지를 작곡했다.

국화가 처음 미국에 전해진 것은 유럽보다 약간 늦은 1798년이었는데, 유럽에서 주로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달리 가을꽃을 대표하는 꽃으로 큰 인기를 끌며 컨테이너 식물로도 널리 재배됐다. 미국에서 국화는 기쁨과 긍정의 의미가 부여돼 집들이 선물, 병문안 꽃다발, 코르사주로도 인기였다. 재미있게도 홈커밍 풋볼 게임을 응원할 때 국화가 많이 사용됐다. 1883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의 국화쇼가 열린 이래로 오늘날에도 롱우드가든이나 뉴욕식물원에서 해마다 성대하게 국화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특히 롱우드가든의 가을철 시그니처 전시로 유명한 천송이 국화(Thousand Bloom Mum)는 장장 17개월 동안 재배한 한 줄기 국화로부터 1500개가 넘는 꽃을 피워 낼 정도로 놀라운 원예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국화가 속해 있는 국화과(Asteraceae)는 2만3000종 이상의 식물을 포함하며 난초 다음으로 큰 과(family)를 이루고 있다. 코스모스나 해바라기 같은 일년초, 엉겅퀴나 아티초크 같은 다년초뿐 아니라 관목과 덩굴식물, 교목도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상추도 국화과다. 국화과의 꽃은 혀 모양의 설상화와 통 모양의 관상화로 이뤄진 가장 진화된 형태의 복잡한 두상화라는 꽃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송이로 보이는 꽃이 사실은 수많은 작은 꽃의 집합체인 셈이다. 지금까지 수천 종의 국화 품종이 개발됐는데 워낙 많은 종류가 있다 보니 분류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가장 단순하게는 꽃의 지름에 따라 대국(18㎝ 이상), 중국(9㎝ 이상), 소국(8㎝ 이하)으로 나눈다. 꽃 피는 시기에 따라 나눌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가을에 피는 추국, 약간 늦게 초겨울에 피는 동국, 개화 시기를 한참 앞당겨 여름에 피는 하국이 있다. 설상화와 관상화로 이뤄진 꽃 자체의 형태에 따라서는 홑꽃·겹꽃·장식형·폼폰형·아네모네형·거미형·스푼형 등 13개 그룹으로 나뉜다. 스프레이멈(Spray Mum)은 한 줄기에 여러 꽃송이가 달리는 국화 종류를 말하는데 꽃은 여러 형태를 가질 수 있으며 절화용이나 정원용으로 쓰인다.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국화 품종 가운데 ‘코리안 그룹’이라고 불리는 종류는 우리나라 산구절초에서 유래된 품종 가운데 왜성이면서 강한 내한성을 지니고 있어 인기가 많다.

국화는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야 꽃망울이 생긴다. 낮의 길이는 빛을 뜻하므로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절이 가능하다. 여름철에 빛가림으로 단일처리를 하면 개화기를 앞당길 수 있다. 하지만 고온에서는 여러 장애가 생기므로 유의해야 한다. 반대로 빛을 더 오래 비춰주는 장일처리로 개화기를 늦출 수도 있다. 이런 인위적인 조절을 통해 8주, 10주 혹은 13주 만에 꽃이 피는 다양한 국화가 재배될 수 있다.

국화는 모든 것이 스러져 가고 서리가 내려앉는 계절에 오히려 영광스러운 시간을 맞이한다.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대기만성인 셈이다. 그래서 국화를 즐기는 것도 천천히 음미하는 완상법이 좋다. 정신을 명료하게 하는 찬 바람과 따스한 저녁노을이 공존하는 늦가을의 정원에서 국화꽃들을 바라보며 고요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면 잠시 모든 근심을 잊고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해 동안 수고한 몸과 마음에 좋은 기운을 보충해 줄 국화차 또는 국화주를 살짝 곁들여도 좋을 것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국화(Chrysanthemum morifolium)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영미권에서는 보통 ‘플로리스트 크리산세멈(Florist Chrysanthemum)’이라고 부른다.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노란색, 하얀색, 분홍색, 자주색, 빨간색 등을 띠는 화려한 설상화와 노란색 관상화로 이뤄진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품종이 있다. 종명인 모리폴리움(morifolium)은 뽕나무 잎을 닮았다는 뜻이다. 6시간 이상 햇빛이 비치는 양지를 좋아하며, 배수가 아주 잘되는 유기질이 풍부한 토양에서 잘 자란다. 일부 품종은 겨울에 화분을 냉상(cold frame)이나 서늘한 실내에 들여놓고 월동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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