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꾸준함' 그리고 '장수(長壽)'의 상징, 이창수 KBL 경기분석관

손동환 2021. 10. 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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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9월호에 게재됐고, 기사를 위한 인터뷰는 2021년 8월 9일 오전 11시에 진행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시작은 남들보다 늦었다. 그러나 철저한 몸 관리와 이타적인 마인드로 남들보다 오랜 시간 코트에 머물렀다. ‘선수 이창수’를 요약하자면 그렇다.
42살까지 선수 생활을 한 이창수는 다른 농구인들처럼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농구’와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농구’를 ‘돈독한 친구’로 표현했다. ‘농구’를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선수 이창수는?
군산고와 경희대를 졸업한 이창수는 명문 실업 팀인 삼성전자(현 서울 삼성 썬더스)에 입단했다. 삼성전자의 핵심 빅맨으로 삼성전자의 1992~1993 농구대잔치 결승전 진출에 기여했다. 군 제대 후 복귀 시즌(1994~1995)에도 팀의 농구대잔치 결승전 진출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위기에 봉착했다. KBL이 창설될 때쯤, 이창수는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KBL 원년 시즌(1997)과 두 번째 시즌(1997~1998)을 통으로 날렸다. 미래도 보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창수는 코트에 돌아왔다. 1997~1998 시즌 후반부터 2010~2011 시즌까지 14시즌 동안 527경기를 뛰었다. 데뷔 후 가장 긴 시즌 평균 출전 시간이 18분 54초에 불과했지만, 42살까지 뛸 정도로 뛰어난 생존 능력(?)을 보였다.
이창수는 ‘모범적인 몸 관리’와 ‘장수 선수’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이창수 본인은 ‘후회’와 ‘아쉬움’이라는 단어로 선수 생활을 요약했다. 선수로서 잘했던 것보다 부족했던 걸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먼저 ‘선수 이창수’를 돌아봐주세요.
선수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그 때는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변 분들께서 저한테 “너는 모범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해주시는 건 좋은데, 저는 사실 기능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했어요. 그런 점에 더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후회도 들고요.
지금 제 아들(서울 삼성 이원석)이 농구 선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를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건 최대한을 하라”고요. 저처럼 후회 없이 선수 생활을 했으면 하거든요.
많은 게 부족하다고 하셨지만, ‘훅슛’만큼은 뛰어났다는 평이 많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훅슛을 처음 배웠습니다. 은사님이신 최부영 선생님께서 ‘너는 팔도 길고 손도 커서 훅슛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셨죠.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기본기가 너무 부족했어요. 훅슛 역시 생소했어요. 나름 해본다고는 하는데, 너무 어려웠어요. 타점도 밑에 있었고, 동작이 어설펐어요. 배우고 익히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웃음)
연습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부분 선수들이 운동 시간 때 슛을 많이 쏘는데, 저는 훅슛을 많이 연습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자유투 라인에서 슈팅할 때, 저는 그 거리에서 훅슛을 연습했죠.(웃음)
연습하다 보니, 저만의 연습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제자리에서만 훅슛을 하는 게 아니라, 피벗이나 턴 동작 이후의 훅슛도 많이 연습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습을 하며, ‘이거 괜찮겠는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제 주요 공격 패턴이 됐고요.
‘훅슛’이라는 비기를 함지훈 선수(현 울산 현대모비스)한테도 전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함)지훈이가 처음 입단해서 ‘훅슛을 배우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어요. 저도 그 기사를 봤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이미 (훅슛 동작이) 자연스러웠어요. 동작이 잡혀있었죠.
그래서 지훈이한테 특별히 알려줄 게 없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노하우와 연습 방법만 알려줬어요.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만 했던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지훈이의 훅슛을 저와 연관시키지만, 지훈이 혼자 터득한 거예요. 지훈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지훈이가 자신만의 무기로 만든 거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신가요?
원년 이후 첫 두 시즌(1997, 1997~1998)을 못 뛰었습니다. 1997~1998 시즌 후반에 투입됐지만, 소속 팀(당시 수원 삼성, 현 서울 삼성)의 플레이오프 탈락이 이미 확정됐습니다.
개인적으로 1998~1999 시즌을 정식 복귀 시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준비를 거친 후, 코트에 나선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기억이 가장 크게 나요.
※ 이창수의 복귀전 일자는 1998년 2월 22일이었다. 복귀전 상대는 인천 대우증권(현 한국가스공사)이었다.
농구대잔치에서 KBL로 전환된 후, 외국 선수들이 합류했습니다. 또, KBL 초창기만 놓고 보면, 외국 선수 2명이 40분 내내 뛰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 이창수’는 오랜 시간 KBL에서 뛰었는데요.
농구대잔치에서는 베스트 멤버로 출전했습니다. 뛰는 시간도 길었고, 파울 트러블에 걸릴 때나 체력적으로 힘들 때 벤치에 갔죠.
그런데 KBL이 출범된 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국 선수들이 2명이나 뛰었고 제가 아프고 나서 복귀전을 치렀기에, 제가 긴 시간을 뛰는 게 어려웠습니다. 외국 선수들이 파울 트러블에 처하거나 힘들 때, 제가 대신 들어갔죠. 농구대잔치와 반대 상황이 된 거예요.(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외국 선수들한테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제가 비집고 들어갈 구멍이 안 보였거든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흐름은 이미 그렇게 흐르고 있었어요, 제가 그 흐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했죠. 제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것과 팀이 나한테 필요로 하는 걸 생각했어요. 그게 궂은 일이었어요. 그래서 수비와 리바운드부터 했고, 수비와 리바운드라도 내 걸로 만들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외국 선수를 막는 게 어려웠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견디는 노하우가 생겼어요. 정말 뛰어난 선수들이 아니라면, 제가 어느 정도 막겠더라고요. 외국 선수가 힘들어할 때 제가 어느 정도 메워줄 수 있게 됐고, 그러면서 팀이 저를 점점 필요로 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외국 선수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어요. 외국 선수가 1명만 뛰는 쿼터가 생겼죠. 그 시간(외국 선수가 1명만 뛰는 쿼터)만큼은 제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시간만이라도 남들한테 빼앗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간도 빼앗기면, 은퇴도 생각했습니다.(웃음)
이유가 있었어요. 선수도 코트에서 뛰어야 선수지, 벤치에서 시간만 떼우는 선수는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분이라도 더 뛰기 위해, 간절히 훈련하고 간절히 시합에 뛰었던 것 같아요. 1분을 40분처럼 생각했고, 1분에 모든 걸 쏟으려고 했죠. 그러다 보니, 팀에서 믿음을 얻은 것 같고, 출전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다고 생각해요. 그게 운 좋게도 42살까지 이어졌고요.(웃음)

은퇴 그리고 다양한 경험
앞서 이야기했듯, 이창수는 42살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평균 출전 시간이 길지 않은 선수였기에,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창수는 은퇴 직후 모교인 경희대에서 코치를 맡았다. 그 후 친정 팀이었던 서울 삼성에서 전력분석원 임무를 수행했다. 전력분석원 이후에는 모교인 군산고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쳤다.
한 곳에 오래 머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다양한 위치에서 쌓은 다양한 자산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자기 위치에서 늘 최선을 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은퇴를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후배들한테 ‘3점 하나 넣으면 은퇴하겠다’는 농담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즌에 3점이 들어가더라고요.(웃음)
※ 이창수는 2010~2011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2010~2011 시즌 2개의 3점슛을 넣었다
그렇게 농담한 이유가 있어요. 제가 3점을 거의 안 던졌거든요. 사실 3점 라인 밖으로 나와서 던져도 되는데, 저 스스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미드-레인지에서 주로 움직이다 보니, 3점 시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3점을 넣으면 은퇴하겠다’는 농담을 후배들에게 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렇다면 은퇴한 본연의 이유는 어떤 거였을까요?
42살까지 선수 생활을 한 것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욕심을 더 낼 수도 있었어요. 체력이 떨어지더라도, 10분 이상 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앞서 말씀 드렸듯, 저는 이미 선수 생활을 길게 했습니다. 또, 위에서 이야기했듯, 벤치에 오래 앉는 선수는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려면, 제가 그 자리를 비켜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퇴 직후에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은퇴하고 나서 경희대 코치로 2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울 삼성에서 전력분석원을 했고요. 삼성에서 전력분석원을 마친 후에는 모교인 군산고에서 학생 선수들을 가르쳤습니다. 한 군데에 오래 머무른 건 아니지만,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더라고요.(웃음)
대학교 코치와 전력분석원, 고등학교 코치 등 다양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경험한 것들이 다 달랐을 것 같은데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알려주고 싶었던 걸, 선수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거든요.
특히, 제가 농구를 늦게 시작하다 보니,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 선수들한테 기본기를 많이 강조했던 것 같아요.
또, 농구는 반복 운동입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 연습해 자기 걸로 만드는 운동입니다. 그걸 중요하게 여기는 친구들은 발전했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정체됐습니다. 대비되는 상황을 보며, 기분이 좋기도 했고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런 걸 가장 크게 느꼈던 것 같아요.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기본기를 어느 정도 완성한 선수들이 대학교에 옵니다. 대학교는 부족한 걸 완성하는 곳이자 프로에 나가기 전 마지막을 보내는 곳이죠. 그래서 대학 선수들은 배워왔던 기본기를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걸 발전시킬 줄도 알아야 하고요. 지도자들은 그런 요소에 중점을 맞춰야 하죠.
전력분석원 시절에는 선수 때 보지 못했던 걸 많이 봤습니다. 선수 때는 만들어진 자료만 봤다면, 전력분석원 시절에는 영상을 직접 보고 자료를 직접 수집했거든요. 그러면서 선수 때 알지 못했던 걸 많이 알게 됐습니다.
영상을 여러 번 보고 분석 자료를 만들면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놓칠 수 있는 요소들을 캐치하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분석한 것들을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에게 알려줬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색달랐던 것 같아요.

레전드 이창수? 이원석의 아버지!
농구인 2세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농구대통령 허재’의 아들인 허웅(원주 DB)과 허훈(수원 kt)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허웅과 허훈이 ‘허재의 아들’이었다면, 이제는 허재가 ‘허웅과 허훈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창수 역시 마찬가지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원석(서울 삼성)은 ‘이창수의 아들’로만 불렸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이원석은 연세대 핵심 빅맨으로 성장했고, 이창수는 ‘이원석의 아버지’가 될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창수는 아들 이야기에 미소를 지었다. 매년 발전하는 아들을 대견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농구 선배로서 냉정한 평가도 내렸다. 그러나 대견한 마음과 냉정한 평가의 근본적인 이유는 동일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들이자 농구 후배인 이원석의 발전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작년부터 KBL에서 경기분석관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그 직책을 맡게 돼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교육 받을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규정이나 규칙 등 분석관으로서 공부할 것들이 있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거의 놀고 있습니다.(웃음)
연세대에 재학 중인 이원석 선수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인터뷰일 기준으로, 이원석은 연세대학교 소속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농구를 시킬 마음은 정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퇴하고 보니, (이)원석이와 대화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가는 게 원석이의 일상이다 보니, 저와 원석이가 만날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원석이가 농구를 한다면, 원석이가 궁금해하는 걸 저한테 물어볼 것 같았어요. 그러면 저와 원석이가 대화할 시간이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원석이가 대치동에 있는 학원을 다녔습니다. 선행 학습을 어느 정도 했다고 판단했어요. 만약에 원석이가 농구하는 게 좋다고 하면, 저는 농구를 시키려고 했어요. 반면, 원석이가 농구를 못하겠다고 하거나 농구 선수로서 싹을 보이지 못하면, 저는 원석이한테 다시 공부를 시키려고 했어요.(웃음)
그래서 원석이 엄마한테 ‘농구를 한 번 시켜보면 어떨까?’라고 물어봤어요. 원석이 엄마도 처음에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시켜보자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원석이가 공부를 곧잘 했거든요. 운동을 시키는 게 맞는 건지 공부를 시켜야 하는 건지 고민했습니다. 또, 학업 단계가 올라갈수록 공부를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원석이는 농구 선수로서 매년 발전했습니다. 무엇보다 원석이가 농구를 하면서, 가족 간의 분위기도 좋아졌습니다. 가족 간에 대화할 기회가 많아졌거든요.(웃음)
코치님께서는 오랜 시간 농구를 하셨습니다. 걱정도 많이 하셨을 텐데요.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고 농구를 시켰다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는 게 병’이라는 옛 속담도 있잖아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농구 선후배인데, 이러기도 저러기도 쉽지 않았어요. 속으로 끙끙 앓는 일도 많았죠.
다행히, 원석이가 힘든 걸 잘 견뎌줬습니다. 힘든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한 단계 올라서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이 대견했죠. 제가 했던 생각들이 정말 짧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원석 선수는 연세대에서 재능을 꽃피우는 것 같습니다. 이전과는 어떤 게 달라졌다고 보시나요?
명문 고등학교 팀도 팀원들 간의 실력 차가 큽니다. 그래서 에이스나 빅맨을 더 많이 견제합니다. 그러면 견제를 받는 선수가 자기 플레이를 하기 힘듭니다. 원석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1대1 능력을 갖췄지만, 그 가치가 묻혔다고 생각해요.
반면, 연세대에는 농구를 할 줄 아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강팀이기도 하고요. 전력 불균형이 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석이가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편하게 농구하는 것 같아요.
원석이를 가르치고 있는 은희석 감독이 선수의 강점을 잘 파악하는 것 같아요. 선수의 강점에 맞게 코칭해주는 것 같아요. 디테일한 부분도 잘 잡아주고요. 그래서 원석이가 매년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듯하시죠?
그렇죠.(웃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대학교에는 갈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차라리 공부를 시켜서 대학교에 보내는 게 쉽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렇지만 원석이가 선수로서 매년 발전하니, 아빠 입장에서는 기분 좋고 뿌듯하더라고요.
뜬금없지만, ‘선수 이창수’와 ‘선수 이원석’을 비교해주세요.
훅슛과 수비 말고는, 원석이가 훨씬 낫지 않을까요?(웃음) 슛과 돌파 등 전체적인 기량이 저보다 훨씬 나아요.
특히, 원석이는 207cm의 키에 빠른 공수 전환 속도와 돌파 능력도 지녔어요. 김주성 코치와 김종규(이상 원주 DB) 외에는 그런 선수가 거의 없었잖아요. 큰 키에 달릴 수 있다는 게 원석이한테 큰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농구 : 돈독한 친구
다시 이창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창수는 ‘후회’와 ‘아쉬움’이라는 단어로 선수 시절을 요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는 이창수한테 여전히 소중한 존재였다. 본인과 아들 모두 농구와 연관됐기에, 농구는 이창수한테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농구’를 어느 단어보다 진지하게 생각했다.

선수 시절 가장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개인적으로 뿌듯했던 기억은 거의 없어요.(웃음) 선수로서 저한테 만족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불만이 아니라, 부족함의 의미로요. 제가 선수로서 부족한 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간 일이 많았어요. 그게 제일 아쉬워요.
그래도 제가 팀에 도움이 됐을 때는 뿌듯했어요. 예를 들면, 외국 선수가 5반칙으로 물러나고, 팀이 시소 게임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나가서 팀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메워주고, 팀도 이겼어요. 그럴 때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쌓이면, 팀의 승리도 쌓여요. 팀 승리가 쌓이다 보면 팀 성적이 좋아지고, 그런 게 쌓이다 보면 우승도 할 수 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런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는 것 같아요.
※ 이창수는 2000~2001 시즌 수원 삼성 소속으로 첫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2006~2007 시즌 울산 모비스에서는 두 번째이자 선수 생활 마지막으로 우승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제일 아쉬운 건 어떤 거였나요?
계속 말씀드렸지만, 후회가 더 많습니다. ‘그 때 이랬다면, 내가 이랬을 건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3점슛도 그 중 하나입니다. 3점슛을 꾸준히 연습했지만, 실전 때 시도하지 않았어요. 훅슛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슛을 너무 안 쏜 것 같아요.(웃음) 실전 때 (3점) 시도라도 많이 했다면, ‘선수 이창수’의 가치가 더 높았을 거라고 봐요.
특히, 던져야 할 때 머뭇거린 게 아쉬워요. 연습할 때 성공률이 좋아도, 실전 때는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 때 조금 더 자신 있게 시도했다면, 3점에 관해서도 더 좋은 결과를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농구’라는 단어는 각별한 의미일 것 같습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을 예전에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농구’의 의미를 여러 번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돈독한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농구’는 저와 항상 함께 해왔던 존재였고, 앞으로도 끊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마지막으로 ‘이창수’를 그리워하는 팬들한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그리워해주는 분들한테 감사하다는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웃음) 더 좋은 모습으로 팬들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 KBL 제공(본문 1~3번째 사진), 이창수 제공(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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