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사과'에 옹색한 정치권

송길호 2021. 10. 25.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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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독일에서 사과를 할 때 가장 흔히 쓰는 표현 중의 하나는 ‘엔트슐디궁(Entschuldigung)’ 혹은 ‘엔트슐디겐 지 미히(Entschuldigen Sie mich)’다. 이 표현은 ‘Ent’라는 접두사와 ‘Schuld’의 동사형이 합쳐진 형태인데, 독일어로 ‘Ent’는 부분적으로 ‘제거’의 의미를 포함하고, ‘Schuld’는 ‘책임, 부담, 잘못’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Entschuldigung은 ‘죄나 책임 혹은 부담을 사(赦)하여 달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사과란, 자신과 관련한 책임이나 잘못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런 사과에 유난히 옹색하다. 과거 정권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렇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당시에도, 대통령은 언제나 한 템포 늦게 사과를 했다. 현 정권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지난 4.7 재보궐 선거 당시 야당이 “투표가 위선·무능·내로남불을 이깁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을 때, 중앙선관위는 “특정 정당·후보자를 쉽게 유추할 수 있는 표현이라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는데, 이는 이 정도로 현 정권의 내로남불이 심하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내로남불’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잘못’이라는 뜻인데, 이런 내로남불이 남발되는 상황에서는, 남 탓만이 난무하게 돼,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과거 정권에 비해 사과의 타이밍이 점점 늦어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현 정권은, 자신들은 그동안 수없이 사과를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횟수로만 따지면 현 정권의 이런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정권이 ‘솔선수범’해서 했던 사과의 상당 부분은 과거 정권의 과오에 대해서였다. 이런 종류의 사과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사과는 인색하고 과거 정권이 한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사과한다면, 이는 ‘사과’라는 단어가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퇴색시킨다. 사과의 본래적 의미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사해 달라는 것인데, 과거 정권들의 과오를 부각시키는 사과는 단지 ‘책임 전가’를 위한 수단적 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 정권은 ‘사과’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내로남불이라는 의미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기 대선에서는,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그런데 요새 정치권을 보면, 이런 바람이 ‘주관적 희망’에 그칠 것 같아 걱정이다. 여야 후보 가릴 것 없이 사과에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여당 후보인 이재명 후보의 경우, 두 번의 국감에 참석해 ‘자신이 원하는 말’은 했을지 몰라도, 국민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핵심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 후보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썼다는 데에 대해서는 사과했지만, 국민들에게 박탈감을 주는 사건이 자신의 시장 재임시절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도의적으로 적극적인 책임 표명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억울하다고 해도 책임있는 모습은 보였어야 했다는 것이다.

야당의 유력 후보인 윤석열 후보도 사과에 인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윤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호남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고 말했던 것에 대해 지난 21일 사과했지만, 해당 발언에 대한 사과는 발언 직후에 했어야 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니까 사과했다는 또 다른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즉각적인 사과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과 이후에 자신의 애완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SNS에 올려 또 다른 논란을 몰고 왔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사과를 한 이후, 해당 사안이 약간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던 터에, SNS에 이런 사진을 올려 오히려 비판 여론을 증폭시키고 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인은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과의 타이밍과 내용도 마찬가지다. 대선 유력 후보들이 이제라도 책임감 있는 모습, 용기 있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이유도, 국민을 위주로 생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송길호 (khsong@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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