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짧은 유산들, 핫플을 넘어 '남길 것'의 가치 공유해야

허남설·김태희 기자 2021. 10.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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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고·남고..엇갈리는 운명

[경향신문]

서울시는 2008년 8월26일 옛 서울시청 본관 태평홀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켜보는 눈’이 없는 근현대 유산
보편적 욕망 앞에 쉽게 허물어져
반세기 넘겨야 ‘등록문화재’ 대상
50년 안 된 건물, 평가조차 못 받아
옛 서울시청 본관 뒤편의 ‘태평홀’
등록문화재였지만 기습 철거당해
전국 ‘무명의 유산’ 처지는 더 심각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해당 문화재를 관리·보호하여야 한다.’

문화재보호법 제33조는 문화재 소유자 관리의 원칙을 이같이 규정한다. ‘선량한 관리자’는 관리자의 심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문화재 관리자의 의무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법적 용어다. 문화재를 자기 재산 이상으로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뜻이 강하다. 이는 국보나 보물 등 지정문화재 관리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등록문화재의 경우 관리자 의무는 ‘원형 보존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수준으로 확 떨어진다. 지정문화재와 달리 근현대 유산의 ‘자발적 보호’에 목적을 두고, 소유자가 활용하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이다. 건축물 면적의 ‘4분의 1 이상’을 바꿀 때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하도록 규정한 정도가 나름 세운 보존의 원칙이다.

지정문화재도, 등록문화재도 아닌 유산은 사실상 ‘무법지대’다.

국회서 제도적 공백 메우기 위해
‘예비문화재’ 선정 등 관련법 발의
소유주 관리의무 강화 추진했지만
상정 후 큰 관심 못 받고 답보 상태

등록문화재의 경우 대체로 50년 넘은 유산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50년이 안 되면 평가조차 제대로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근대 문턱에서 일제강점을 겪은 탓에 ‘잔재’로 치부된 근대유산에 대해서는 가치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곤 한다. 국가 차원에서 근현대 유산이 체계적으로 취합·관리된 적이 없기에 이 순간에도 어디에서, 어떤 유산이 사라지는지 국가도, 지자체도 알기 어렵다.

한마디로 근현대 유산은 ‘지켜보는 눈’이 없다. 낡고 작은 건물을 부수고 크고 새롭게 지어 자산을 불리려는 보편적 욕망 앞에 소유주의 선량 혹은 노력을 바라기는 쉽지 않다. 서울시는 새 청사 건설작업에 걸림돌이 된다며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 본관) 뒤편에 있던 태평홀을 2008년 8월26일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등록문화재도 이런 대우를 받는데 전국에 흩어진 무명의 유산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면 철거 후 개발에 익숙한 풍토에서는 문화재 제도 바깥에 수많은 근현대 유산이 방치될 수밖에 없다.

‘문지기 역할’ 수행하는 광주시

제도 울타리 밖에 있는 유산을 보호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서울시의 이른바 ‘공평동 룰’을 들 수 있다. 종로구 재개발사업지인 공평1·2·4지구에서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켜켜이 쌓인 건물·길 터가 발견되자, 서울시는 재개발사업에 추가 용적률을 허용하되 유적을 전면 보존하는 쪽으로 길을 텄다. 이 유적을 전시하는 곳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일부만 옮기고 그대로 덮었던 전례들에 비하면 진일보했다.

다만 공평동 유적은 단순 건물·길 터이긴 해도 500여년 역사를 간직했다는 상징성이 강했다. 수십년 된 근현대 유산은 그만큼 관심을 불러모으기 어렵다. 이 시간의 차이를 배제하면 결국 공평동 룰에서 남는 교훈은 ‘문지기의 역할’이다. 민간 영역에서 발굴된 공적 유산을 보호하도록 개입하는 일이다. 공평동 룰에선 재개발사업자와 협의를 이끌어 낸 공공, 즉 서울시의 역할이 컸다.

전남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는 매년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목포시 제공

문지기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을 민간사업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에게 인허가권이란 ‘무기’가 있지만, 정비사업을 규정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은 단순 절차법이므로 절차에 문제가 없으면 적극 활용하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 광주 전남·일신방직 부지 재개발사업은 지자체가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사례다. 전남·일신방직 부지는 1930년대부터 산업유산이 누적된 곳이다. 광주시는 재개발사업에 필요한 용도 변경 승인 권한을 갖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개입 중이다. 산업시설 수백개에 대한 평가를 진행해 철거·보존 계획을 세운 다음 사업자와 협의해 개발계획을 도출한다는 게 광주시의 구상이다.

전남·일신방직 평가 작업에 참여한 송석기 군산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개인 소유물에 대해 문화재 관련 법률만으로는 컨트롤(조정) 안 되는 부분이 있지만, 지자체가 도시계획 등에 대한 권한을 적극 활용하면 공적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 갈 수도 있다”며 “지자체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사실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운상가(왼쪽)는 상향식 논의로 보존에 성공했지만, 인천 부평구 산곡동 영단주택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철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허남설 기자

‘상향식 논의’로 보존한 세운상가

문지기가 제 역할을 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근현대 유산의 의미와 가치가 정립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공공이 개입할 근거를 갖는다. 광주시처럼 재개발이 예고된 다음 ‘사후 개입’을 할 경우, 재산권을 내세워 절차를 재촉하는 사업자와의 분쟁 가능성이 부담이 된다. 서울시의 ‘흔적 남기기’ 사업 취소가 그런 예다. 초기 현대식 아파트 생활상을 보전한다는 취지에서 재건축 중인 개포·반포·잠실 주공아파트 1~2동씩을 남기게 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시 지자체장의 의지는 강했지만, 가치 평가와 보존 방식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송 교수는 “어떤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지 아니면 그냥 없앨지 혹은 일부분만 남길지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며 “미처 가치를 알기도 전에 건축물이 사라져 버리는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근대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였고 건축물도 마찬가지였다”며 “결국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역지자체 차원에서 ‘한옥 등 건축자산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건축자산 기초조사를 실시 중이지만, 일회성·하향식 조사로는 수많은 근현대 유산을 면밀하게 평가하기가 어렵다. 서울시가 집계한 건축자산은 한옥을 제외하고도 1083개다. 일상적으로 민간의 연구나 활동을 수렴하는 상향식 체계 필요성이 제기된다.

인천 부평구 산곡동 87번지 일대 ‘영단주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철거만 기다리는 경우다. 영단주택은 주택공사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1940년대 초 700호 규모로 건립한 노동자 집단주거지다. 지금도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도미이 마사노리(富井正憲) 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에 따르면, 영단주택은 ‘근린주구론’에 입각해 주택과 ‘포켓 파크(Pocket Park·소공원)’, 관리소, 탁아소, 공동 급수시설 등을 배치한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주거단지’다. 근린주구론은 공공·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는 생활권에 관한 도시계획 이론으로, 미국 도시계획가 클래런스 페리(1872~1944)가 주창했다. 이처럼 민간의 연구가 다각도로 진행됐지만 공적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영단주택은 일대 재개발사업으로 철거 직전에 이르렀다.

상향식 혹은 민관협력 논의 구조는 근현대 유산의 지평을 넓히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서울시는 2014년 을지로 세운상가 존치 결정을 내리고 2016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을 실시 중이다.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는 1967년 건설 당시 최고의 주상복합아파트로 불린 건축유산이면서, 현재도 7000여개 사업체와 기술자 2만여명이 일하는 산업유산이기도 하다. 2014~2015년 다양한 분야의 민간 연구자·기획자가 뭉쳐 ‘도심 제조업 생태계’ ‘메이커시티(Maker City·생산자 도시)’ 등을 세운상가의 핵심 가치로 부각시켰다. 유형(건축)·무형(산업)의 의미가 모두 강조되면서 세운상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인스타 핫플’을 넘은 가치 세우기

최근 관광자원화·지역자산화 강조
너도나도 ‘뜨는 공간’ 조성에 관심
이젠 ‘유지 어떻게’ 해법이 더 중요
가치 계량화하는 역량 키우기 과제

근현대 유산을 평가하는 목적은 결국 남길 것과 부술 것을 가리기 위함이다. 역사가 짧은 근현대 유산은 대체로 다시 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유물처럼 박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등록문화재 취지 자체도 ‘일상생활에 맞게 다양하게 활용해 문화재를 적절히 보호한다’(문화재청)는 데 있다.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관광자원화’나 ‘지역자산화’도 강조된다. 근현대 유산이 ‘돈이 된다’고 손짓하는 셈이다.

하지만 수십년 된 건축물을 새로운 용도로 쓰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건축물 본래 용도를 바꾸려면 내부 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와는 필요한 주차공간이나 설비 조건도 다르다.

현실적 요구에 맞춰 개량하다 보면 고유의 정체성을 건드릴 수도 있다.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은 등록문화재 개조 시 신고가 필요한 경우를 ‘외관 면적의 4분의 1 이상’이라고만 규정한다. 이 기준만 넘지 않으면 지자체의 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안창모 교수는 “근대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소유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만은 아니다’란 점을 강조하면서 활용을 장려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쪽으로만 치우치다보니 활용 방식에 관해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사실”이라며 “지역 재생이나 관광이 개입해 돈을 벌게 해준다고 인식하게 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정부가 2018년부터 군산·목포·영주 등에 조성한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이 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등록문화재 제도를 점(건물 한 채) 단위에서 선(거리)·면(동네) 단위로 확대 적용한다는 취지는 관광자원화로 이어졌고, 소셜미디어에 오르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하지만 ‘목포가 뜨면 군산이 지고, 통영이 뜨면 목포가 지는’ 흐름 속에서 회의적인 전망도 나온다. 송석기 교수는 “지자체가 너도나도 ‘뜨는 공간’을 한번 만들어 보자며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제도적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있지만 역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전·관리 및 활용에 관한 법률안’은 등록문화재와 근현대 유산에 관한 별도 법률 체계다. 50년이 안 된 유산을 ‘예비문화재’로 선정할 수 있게 했으며, 등록문화재·예비문화재 모두 소유주의 관리 의무를 ‘선량한 관리자’로 높였다. 또 등록문화재의 ‘필수 보존요소’를 지정하고 이 부분을 변경할 경우 지자체에 신고하게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상정된 뒤 진척이 없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같은 법안은 관련 회의 한 번 없이 임기가 끝나 폐기됐다.

근현대 유산에 관한 국내 역량 문제도 과제로 꼽힌다. 대량생산 체제에서 쏟아진 유산의 양만큼 그 가치를 판단하는 전문가도 풍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 교수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근대 건축의 가치를 계량화해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전문가 집단이 크면 심층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 수렴되는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며 “현재는 전문가가 워낙 적다보니 서로 의견 편차가 너무 크게 드러나 계량화하기 어렵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허남설·김태희 기자 nsheo@kyunghyang.com

허남설·김태희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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