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살 '장학퀴즈'..오늘도 10대를 읽는 창이다

김영희 2021. 10. 2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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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도] 장학퀴즈의 어제와 오늘
1970~80년대 '사회적 신드롬' 일으킨 프로그램
계층사다리 끊기고 '종합상식' 의미 사라진 요즘
MZ세대 '관계 맺기' 겨냥 새 포맷으로 시대 반영
1973년 2월 문화방송에서 <장학퀴즈>가 처음 방영되던 당시 모습. 에스케이 제공

“<장학퀴즈> 좋아했죠…. 근데 아직도 해요?”

당신이 이런 말을 한다면 꽤 나이 든 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빠~바 빠~바 빰빰빰빰빠~”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속 기상 시간에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이 흐를 때, 틀림없이 <장학퀴즈> 시그널부터 떠올렸을 것이다. 걱정 마시라, 49년째 ‘장학퀴즈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한국방송(KBS)의 <가요무대>나 <전국노래자랑>이 변하지 않은 포맷을 내세운 장수 프로라면, 1973년 2월 문화방송(MBC)에서 시작해 1997년 1월 교육방송(EBS)으로 옮긴 <장학퀴즈>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과거엔 ‘종합교양과 상식’을 겨루는 개인 간 경쟁이었다면, 지금은 관심사가 다양한 엠제트(MZ)세대의 ‘관계 맺기’와 ‘즐기기’가 열쇳말이다. 한국 사회와 그 시대 10대들의 모습이 투영된 <장학퀴즈>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봤다.

계층사다리 시대 ‘희망’…정치권 출연 압력도

1970년대 서울 정동 문화방송 공개홀엔 토요일마다 10대들이 수천명씩 녹화를 방청하러 몰려왔다. 고교평준화가 아직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않던 시절, 이 프로는 이른바 ‘명문고’들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장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추천을 받은 한주 출연자 5명은 대부분 전교 1·2등이다 보니, 성적은 안 돼도 ‘책 좀 읽는다’는 학생들에겐 녹화날 공개홀에서 치러지는 예심이 기회였다. 출연자들이 끝까지 답을 못 맞힌 문제는 방청석으로 기회가 넘어가는 방식도 인기 요인이었다.

18년간 진행을 맡은 차인태 아나운서는 <장학퀴즈>의 상징이다. 82년 500회 특집 당시 모습. 문화방송 제공

전국에 대학교가 90여곳, 대학 진학률은 27.2%(1980년 기준)에 불과하고,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와 12·12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이어지던 어두운 시대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누구나 공부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계층사다리가 작동하던 고도성장기였다. 적잖은 부모들이 매주 일요일 오전 “전국 남녀 고등학생들의 건전한 지혜의 대결”이라는 차인태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오는 방송을 틀어놓곤 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비록 자신은 뼈 빠지게 일하지만 자식만큼은 공부 잘해서 양복 입는 엘리트가 되길 바라던 부모들이 어쩌다 옆에서 자식이 한두개라도 답을 맞히면 흐뭇해하던 때”라며 “장난 같은 문제가 아니라 고교생들이 ‘진지한’ 문제를 두고 ‘공정한’ 경쟁을 벌이는 <장학퀴즈>는 개발 시대에 일종의 사회적 신드롬이었다”고 말했다.

출연자들은 최종 성적에 따라 대학 입학금, 2년치 등록금, 4년치 등록금(의대는 6년치)을 받았다. 대학이 ‘우골탑’이라 불리던 당시로선 엄청난 혜택이었다. 이를 포함해 제작비 등 일체를 에스케이(SK·당시 선경)가 지금까지도 단독 후원한다. 고 최종현 선경 회장이 500회 특집(1982년 2월) 뒤 제작진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장학퀴즈에 들어간 돈이 150억~160억원 된다”는 임원들 말에, “번 돈은 7조원쯤 될 것”이라 얘기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기업 홍보 효과도 있지만, 인재 교육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었다. 인기가 높다 보니 출연 민원이나 압력 또한 상당했다고 한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최고위층 자녀를 출연시키라 해서 ‘라이벌 정치인 자녀도 출연시키면 하겠다’고 맞서서 무산시킨 적이 있다”고 <한겨레>에 들려줬다.

1983년 제16기 장원전이 펼쳐지던 당시 방청석 모습. 동영상 갈무리

이후 엠씨를 맡기도 했던 송승환씨나 가수 김동률·김광진, 한수진 에스비에스 앵커, 박홍근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 등 장학퀴즈 출신 중 유명인들도 많은데, 지금까지 지속되는 출연자들의 모임 ‘수람’엔 2대째 회원도 꽤 있다고 한다.

엔딩곡 ‘기쁨은 일등만 갖는 게 아닐걸’의 의미

지역 순회 녹화를 정례화하고 실업계고 출연 기회도 늘렸지만, 프로그램 성격상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엘리트주의 벽’은 인기 요인인 동시에 제작진의 고민이었다고 한다. 1990년부터 2년간 진행했던 손석희 전 앵커는 에세이 <풀종다리의 노래>에서 “우리가 교육자는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올바른 학문관, 역사관, 사회관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출자 이여춘 피디가 ‘기쁨은 일등만 갖는 게 아닐걸’로 시작하는 노래를 엔딩곡으로 쓴 것도 그런 문제의식이었다”고 적었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가 나올 정도로 10대들을 내모는 입시 과열에 사회적 비판이 일던 시기다. 이여춘 전 피디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제초제에 들어간 화학물질을 물으며, 골프장 잔디 보존에 제초제를 많이 써 인근 농지가 오염된다는 농민들 주장을 인용했다. 한국전쟁 때 맥아더가 북쪽에 원폭 폭격을 찬성했다는 설명이 들어간 적도 있다. 이런 게 반복되니 위에서 ‘검열’까진 아니지만 사전에 문제를 깐깐히 보더라”고 말했다.

1990년 당시 진행을 맡았던 손석희·정혜정 아나운서. 동영상 갈무리

사회적 의미 외에도 <장학퀴즈>는 먼저 누른 이에게 불이 들어오는 버저 방식, 틀리면 감점돼 막판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 주장원-월장원-기장원으로 이어지는 서바이벌 방식 등 이후 퀴즈 프로 포맷의 ‘정형’ 또한 많이 마련했다. 1970년대 말 동양방송(TBC)이 중학생, 한국방송이 국민학생(초등생) 대상 퀴즈 프로를 만드는 등 한주에 방송 3사 퀴즈 프로가 13개까지 늘었다. 1980년대 말~1990년대에는 대학생 대상의 <퀴즈 아카데미>(MBC)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장학퀴즈>의 조연출·연출을 맡았고 이후 <퀴즈 아카데미>를 만들었던 주철환 전 아주대 교수는 “고교평준화가 정착되며 고교 인재들이 나와 경쟁하는 방식은 매력이 떨어졌다. 5분야 25문제도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문제수를 늘려 속도감을 높이고 ‘해외답사’를 내걸었다. 장학퀴즈가 고전주의적·고답적이라면 퀴즈아카데미는 좀더 낭만적이라고 할까. 시대에 따라 퀴즈도 계속 실험적인 것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MZ세대 겨냥한 ‘선택의 시간’

오락화된 퀴즈 프로 범람 속에 1996년 ‘시청률 저하’를 이유로 문화방송에서 폐지된 <장학퀴즈>는 다음해 1월 교육방송으로 무대를 옮겼다. 2017년 한국기록원에서 대한민국 최장수 프로로 공인도 받았다.

지난 20일 일산 교육방송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장학퀴즈-드림서클> 녹화 현장. 웹툰 작가 주호민이 멘토로 출연하고 6명의 고교생이 대결을 펼쳤다. 교육방송 제공

하지만 스마트폰과 유튜브 검색이 지식을, ‘아이돌 오디션’이 공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을 대체하는 요즘, 예전과 같은 ‘종합상식’ 겨루기는 통하지 않을 터. 지난해 <장학퀴즈―드림서클>로 타이틀을 바꿔 학생들이 꿈꾸는 직업을 가진 현직 ‘멘토’들을 등장시킨 것도 그런 고민의 반영이었다. 3주 전엔 한번 더 큰 변신을 했다. 문제의 답을 맞힌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 다음 라운드에 함께 올라갈 사람을 정하는 ‘선택의 시간’이 추가됐다.

지난 20일, 다음달 방영될 ‘웹툰 작가’편을 촬영 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교육방송 스튜디오. 이미 여러차례 공모전에서 수상했거나 웹소설 작가로 데뷔한 참가자도 있어서인지, 고교생 6명이 멘토 주호민 작가에게 하는 질문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막상 작화 단계로 들어가면 창작이라기보다 힘든 ‘노동’같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영상 세대답게 화려한 스튜디오에서 구석구석 카메라가 돌아가도 긴장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났다는데도 스스럼이 없다. “우리 깐부 하기로 했어요.”

답을 맞힌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은 뒤 다음 라운드에 함께 올라갈 이를 정하는 ‘선택의 시간’ 장면. 교육방송 제공

연출자 이은정 시피(CP)는 “학생들끼리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사실 처음엔 내부의 반대도 많았다. 그런데 나와 네가 상식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서로 다른 시대인데다, 지금 10대들은 어른 멘토들의 이야기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또래들로부터 배운다. 사실 우리 또한 사회에 나와 지식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잡고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그런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나”라며 이번 포맷의 의미를 설명했다. <오징어 게임> 속 파트너 고르기 같은 심리전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진 않더라. 오히려 더 강한 친구들과 겨뤄보고 싶다든지,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든지 같은 이유를 대길래 놀랐다”고 이은정 시피는 말했다. 한편당 2회씩(웹툰 작가편은 1회) 방영되는데, 또래들 사이 어떻게 리더십을 만드는지 지켜보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장학퀴즈>는 오늘도 10대를 읽는 창이다.

고양/김영희 선임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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