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산문에 두번 등장한 니체, 닮음과 다름

한겨레 2021. 10. 25.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33살 프로젝트 : 김수영][거대한 100년, 김수영] (22) 니체
"스승 없다"고 썼지만
당시 니체 붐 모를 리 없어
유품 중 니체 관한 책 있어
'힘'이란 표현의 의미 유사
영원성에도 둘 다 주목
니체의 '위버멘슈'는
'제정신인 사람'으로 묘사
김수영엔 떼어놓을 수 없는
'공동체'와 '다중적 혁명론'
니체에게선 볼 수 없어
김수영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하이데거 선집 중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수영에게 니체가 묻는다. 김 시인 시에 내 생각이 자주 나온다고 하는데? 김수영이 답한다. 나는 그저 내 생각을 쓸 뿐이죠. 제가 영향 받은 시인이나 사상가는 없어요. 니체가 끄덕인다. 그러게 말야, 그저 비슷한 면이 조금 있겠지.

엉뚱한 상상을 하며 이 글을 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니체도, 김수영도 고대로부터 인류가 쌓아온 정보들이 녹아 있다. “스승 없다. 국내의 선배 시인한테 사숙한 일도 없”(‘모더니티의 문제’)다고 김수영은 썼다. 세상의 정보들은 ‘김수영’이라는 필터를 거쳐, 전혀 다르게 생산됐다. 니체 이름은 김수영이 쓴 산문에 두번 나온다.

김수영 시 ‘긍지의 날’ 육필 초고 앞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은 니체를 읽었을까

니체는 <개벽> 창간호(1920. 6. 25)에 소개된 뒤, 서정주, 유치환, 이육사, 김동리, 조연현 문학에서 보인다. 1945년 해방 이후 크게 일어났던 니체 붐을 김수영이 모를 리 없겠다.

그가 “모리스 블랑쇼의 <불꽃의 문학>을 일본 번역책으로 읽었”(‘시작 노트 4’)다고 썼는데, 일본어판 <불꽃의 문학>(1958)에는 다소 긴 ‘니체론’이 한 편 있다.

그의 유품 중에 일본어판 하이데거 저서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가 있다. 1882년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쓴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서 시작하는 이 책에는 신의 죽음 이후 니힐리즘이 인간에게 가치전환과 함께 ‘힘에의 의지’를 일으킨다는 니체의 핵심 사상이 설명되어 있다.

니체가 위버멘슈라는, 굴종하지 않는 ‘강력한 염세주의’를 제시했다고 하이데거는 평가한다. 이때 니힐리즘은 ‘가장 충만한 삶의 의지’가 된다.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생성한다”는 뜻이다. 생성한다는 것은 종래의 가치와 비교하여 새로운 가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곧 ‘힘에의 의지’는 ‘가치전도의 원리’이다.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에서 부제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를 니체식으로 풀면, ‘힘으로서의 시’란 과거의 가치에서 새로운 가치로 ‘가치 전도’ 하는 시를 말한다. 물론 ‘힘에의 의지’가 니체만의 특허라고 할 수는 없다.”

김수영 시 ‘긍지의 날’ 육필초고 뒷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과 니체는 닮았을까

첫째, 김수영 글에서 ‘힘’이라는 단어는 돋아 보인다. “너는 모든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65년의 새 해’) 등 여러번 나온다. 특히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달나라의 장난’)라는 표현은, 위버멘슈는 “제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쓴 니체의 표현과 유사하다. 니체에게 힘의 원천이 고통이라면, 김수영에게 그것은 설움이다.

둘째, 몰락하는 위버멘슈를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 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폭포’)는 표현은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이라 했던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폭포’)은 니체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보라, 나는 번갯불이 내려칠 것임을 예고하는 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이다. 번갯불, 이름하여 위버멘슈렷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버멘슈는 대지의 뜻에 충실한 존재다. “땅에 충실하라”고 니체는 강조했다. 니체가 위버멘슈라는 표현을 썼다면, 김수영은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이라는 말을 썼다.

셋째, 김수영은 힘에의 의지를 ‘긍지’로 표현했고, 니체는 ‘긍정’으로 표현했다. 김수영이 포로가 되어 매맞아 허벅지 상처가 나고 덧난 상처에서 구더기를 걷어냈던 체험은 단순한 개인의 체험이 아니다. 김수영과 당시 사람들이 겪은 신산한 설움이었다. 비틀비틀 흔들리면서도 바로 서는 팽이처럼, 김수영은 설움과 함께하려 했다. 니체는 고통을 이겨내고 영원한 순간, 그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제시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중략) 나는 언젠가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276절)

니체의 사상을 관통하는 디오니소스적 명랑성은 김수영 시의 명랑한 긍지와 통한다. 김수영 시에서 ‘울다’보다 ‘웃다’라는 용언은 얼마나 중요하게 놓여 있는지.

<1953 연간시집>(1954, 문성당)에 실린 김수영 시 ‘긍지의 날’ 인쇄본 앞부분. 맹문재 제공

넷째, 니체와 김수영은 영원성에도 주목했다. “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에 주목하는 김수영은 대지에 서서 영원을 보았다.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달나라의 장난’)을 지닌 그는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긍지의 날’)라고 썼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눈’),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거대한 뿌리’)고 썼다.

질스마리아에서 ‘영원회귀’를 깨닫는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현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항상 다시 되돌아온다”며 영원회귀 사상을 제시했다. 사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허무하지만 운명을 긍정하며 절대행복을 만끽하는 ‘실존적 의미론적 영원회귀’라 할 수 있겠다.

프리드리히 니체. 위키미디어 코먼스

다섯째, 글을 머리로만 쓰지 않고 온몸으로 쓰는 ‘신체적 글쓰기’를 한다는 점이 닮았다. 사망하기 두달 전 김수영은 자기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정리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은 관념보다는 ‘온몸’을 강조했다.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 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김수영, ‘저 하늘 열릴 때’)라고까지 썼다. 니체도 ‘몸’으로 쓴 글을 강조한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중략) 피의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니체,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너의 신체 속에는 너의 최고의 지혜 속에서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썼다. 김수영이 쓴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 삼고 있었는데”(‘구슬픈 육체’) 같은 표현은 니체의 대지와 몸의 사상을 보는 듯하다.

니체가 말하는 ‘몸’은 ‘힘에의 의지’를 생산하는 역동성의 근원지다. “시는 온몸에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김수영의 ‘온몸’도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를 생산하는 ‘몸’과 비교할 수 있을까. 온몸을 훑어 피와 정신으로 쓰는 신체적 글쓰기는 서로 닮아 있다.

김수영 시 ‘65년의 새 해’ 육필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과 니체는 다르다

김수영의 고독은 철저하게 공동체와 연결돼 있다. 그에게 공동체와 관계없는 개인적인 자유란 없다. 자유와 정의는 공동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김수영에게 보이는 다중(多衆·multitude)적 혁명론은 니체에게 없다. 김수영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니체보다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가깝다. 김수영은 공공성을 중요시하여 자신의 시가 “믿음과 힘을 돋우어 줄 것”을 기대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 소리가 빛날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우어 줄 것인가.”(‘시작 노트 1’, 1957)

한국전쟁의 상흔이 있고, 1955년에 베트남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쓴 짧은 글이다. 니체에게 약한 역사성이 김수영 시에서는 알짬이다. 김수영이 젊은 시인 신동엽, 김재원 등을 주목할 때도 그 잣대는 역사성이었다. 니체와 김수영, 두 사람의 생각에는 닮음과 다름이 있다. 필자가 지금 단행본으로 쓰고 있는 둘 사이의 닮음, 둘 사이의 다름은 여전히 미래를 열어가는 유효한 시각을 제시한다.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교수.
긍지의 날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