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일상'을 생각한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2021. 10. 2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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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단계적 ‘일상회복’이 곧 시작될 모양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비상한 2년을 보낸지라 ‘일상’이란 말이 아스라이 그립다. 그동안 크나큰 타격을 입으며 견뎌온 자영업자에겐 긴 가뭄 끝 단비일 터다. 하지만 지난달 국회 주변에 경찰의 저지를 뚫고 어렵사리 차린 ‘자영업자 합동분향소’가 말해주듯, 막다른 골목에 몰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들의 일상은 영영 회복될 수 없다. 견디다 못해 폐업하고 빚에 시달리는 이들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아시아나 케이오’를 비롯해 코로나를 빌미로 기업이 해고한 노동자들의 일상은 어떻게 회복해야 하나? 강제로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방역의 이름으로 빼앗긴 민주주의의 일상, 집회의 자유는 온전히 회복될까?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했지만 지난 4월 평택항의 이선호, 이달 초 여수의 현장실습생 홍정운처럼 일하다 사고로 죽는 것이 예사인 참혹한 노동의 일상은 변할 수 있을까?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가 바이러스 감염병 창궐의 근원으로 지목되지만, 채굴과 개발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대규모 자연 훼손은 지금도 여전한 일상이다. 한국전력은 지역 주민의 반대에도 지금 짓고 있는 강릉·삼척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야 한다며 길이 220㎞에 송전탑 440기의 동해안~신가평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을 밀어붙인다. 발전소를 지었으니 발전하고, 발전하니 송전한다는 기계적 논리는 7년 전 극심한 갈등과 인명 피해까지 불렀던 ‘밀양’의 반복이다. 발전과 송전의 피해는 지역에 떠넘기고 수도권은 전기만 빨아먹는 ‘수도권 공화국’의 불공정·불평등의 일상은 무탈하다. 소박한 삶의 평화를 ‘발전’의 이름으로 짓밟는 무도한 일상은 근절될 수 있을까?

석탄발전소 건설 중단 대책을 마련하면 지역 주민의 피해와 자연의 훼손을 막는 건 물론 온실가스도 감축할 수 있지만, 정부는 그럴 의지가 없다. 그 대신 2018년엔 총배출량을, 2030년엔 순배출량을 기준으로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30%에서 40%로 부풀리는 꼼수를 핀다. 정부는 지난달 확정한 ‘제6차 공항개발 종합계획’에서 가덕도와 새만금, 흑산, 백령, 서산, 울릉 공항 개발을 비롯해 총 10개의 신규 공항 계획을 발표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기존의 지역 공항 대부분이 수요 부족으로 적자를 면치 못했고, 공항 개발은 항공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건만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상회복’ 이후 토건공화국의 일상은 더욱더 활기찰 전망이다.

변화 요구에 귀 막은 정치체제서
기다리면 ‘희망’에 묶여 있지만
움직이면 우리가 ‘변화’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회복할 일상이
‘함께 가는 일상’이면 좋겠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정책 제안과 토론은 없고 ‘아니면 말고’ 식의 비리 의혹 제기와 비방만 난무하더니, 급기야 ‘고발 사주’에 이어 ‘대장동’이 정작 다루어야 할 주요 의제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이러고도 거대 양당의 후보 하나가 때가 되면 ‘대통령’을 당연하다는 듯 움켜쥘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이걸 무심하게 또는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강요된 선택에 분노하는 주권자는 많지 않다. 코로나 이전도 이후도 우리 정치의 일상은 뻔뻔하고 무심하고 무기력하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광장의 촛불로 되찾았다는 민주공화국의 일상이다.

“비가 오고 나면 사람이 물을 줄 때보다 작물에 훨씬 더 생기가 돌아요.” 지난여름 경기 양주의 한 수녀원에 머물 때 농사짓는 수녀님이 해준 말이다. 왜냐고 물으니, 사람은 작물에만 물을 주지만 비는 밭 전체에 고루 내려서 그런 것 같단다. 모든 생명체를 품는 자연의 넉넉함이라는 풀이가 그럴듯했다. 전체가 건강해야 부분도 건강하다. 자기 농사도 바쁘지만 수녀님은 일주일에 하루는 일손이 부족한 농가를 도우러 간다. 어떤 농부는 자기보다 다른 농가에 더 필요하다며 수녀님의 일손을 그쪽으로 양보한단다. 수녀님과 농부의 마음이 비를 닮았다.

우리가 회복할 일상이 ‘함께 가는 일상’이면 좋겠다. 산에는 오르막길만 아니라 둘레길도 있다. 걷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땐 오르막길이 아니라 둘레길을 택하면 모두가 즐겁다. 그러려면 땅을 고루 적시려는 ‘비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많아야겠다. 그러면 적어도 그 주위 사람들의 일상은 생기가 돌지 않을까. 물론 개인의 변화만으로 사회의 변화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와 거대 정당들이 변화의 요구에 귀를 막고 가던 길만 재촉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다른 뾰족한 방법을 가늠하기 어렵다.

먼저 우리가 세상에서 보길 원하는 변화가 되지 않으면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 기꺼이 둘레길로 가겠다는 개인이 많아지면서 ‘함께 가는 일상’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도 그만큼 커지길 바란다. ‘고도(Godot)’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우리가 움직일 때 온다. 기다릴 때 우리는 ‘희망’에 묶여 있지만, 움직이면 우리가 ‘변화’가 된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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