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태어난 백말띠 여성, 임신중지 여성, 성소수자가 말하는..'내 몸'

글·사진 김종목 기자 2021. 10. 2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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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선언이 될 때'전

[경향신문]

‘몸이 선언이 될 때’ 전시는 여러 존재의 몸을 다룬다. 이길보라의 영상 ‘My Embodied Memory’(왼쪽 위·아래 사진)는 어머니·할머니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끌어낸다. ‘셰어’의 ‘울퉁불퉁한 연대기: 터져나온 저항, 몸의 발화들’(오른쪽 사진 중 왼쪽)은 낙태죄 폐지 후에도 유효한 구호를 현수막 등으로 펼쳐낸다. 일렉트라 케이비의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오른쪽 사진 중 오른쪽)은 퀴어 커뮤니티와 성전환 관련 사진을 담았다.
낙태죄 폐지 이후 해결되지 못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 문제 넘어
성소수자·전쟁포로의 몸을 ‘직접’ 말하고 연대하는 목소리들

최근 ‘배우 김선호의 낙태 종용 사건’은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몸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현실을 드러낸다. ‘폭로 여성의 진짜 정체는’이라는 보도가 나오는가 하면 ‘꽃뱀’이란 가해의 말도 등장했다.

서울 통의동 보안1942 아트스페이스에서 진행 중인 ‘몸이 선언이 될 때’전(11월3일까지)은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을 국가·남성이 통제·결정해온 문제를 다룬다. 군부독재 때 ‘가족계획’이란 이름으로 많은 태아가 낙태됐다. 초음파 진단이 등장한 후엔 주로 여아들이 ‘남아선호’ 때문에 낙태됐다.

전시 출품작 ‘다시, 태어나, 다시’(2020)의 작가 전규리는 이른바 ‘백말띠’로 불리는 경오년(庚午年) 1990년생이다. “여성이 드세고 팔자가 사납다는 가부장 사회의 여성혐오”가 수치로 드러난 해다. 신생아 성비가 여아 100명당 남아 116.5명이다. “낙태가 불법인 사회적 상황 아래 문화적으로는 여아 낙태를 권장하면서 그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전규리는 초음파 검사 착오로 태어난 ‘생존자’다. “(경오년인) 1930년에 태어났다 일찍 죽고, 1990년에 태어나지 못했다가, 2050년에 다시 태어난 여성”을 작품에 소환했다.

“그러니 낙태해선 안 된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려는 전시는 아니다. 애초 ‘가족계획’이나 ‘남아선호’ 같은 국가 통제와 악습을 두고 ‘생명권’ 주장이 나오지도 않았다. 여성 스스로 임신중지 권리를 주장할 때 백래시처럼 등장한 게 생명권이다. ‘다시, 태어나, 다시’의 주제는 지금 “아이 낳을 여성이 없다” 같은 국가 차원의 ‘저출산’ 우려와 ‘가임 여성’의 대상화 문제로 이어 볼 수 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출품작 ‘울퉁불퉁한 연대기: 터져나온 저항, 몸의 발화들’(2021) 중 현수막에 적힌 ‘우리는 처벌도 허락도 거부한다’ 선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셰어는 낙태죄, 우생학, 쾌락, 장애, 여성, 퀴어를 두고 몸을 규제하려는 시도와 자유와 권리를 만들어내는 운동의 연대를 표로 정리한 작품도 내놓았다.

전시의 기획 취지 중 하나는 여성 스스로 ‘자기 몸과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발화’하는 것이다. 공동 기획자인 이길보라의 출품작 ‘My Embodied Memory’(2019)엔 할머니와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길보라는 농인 어머니와 청인 할머니 사이에서 수어 통역을 진행하며 그간 가부장 사회의 억압과 편견에 짓눌려 말하지 못했던 두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과 몸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국내외 8개 팀이 전시에 참여했다. ‘키라 데인 & 케이틀린 레벨로’의 단채널 영상인 ‘미즈코(水子)’는 키라 데인의 임신중지 경험 이야기를 넣었다. “여성의 몸을 재생산 도구로 환원한 사회에서 강요하던 죄책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슬픔과 애도처럼 자연스레 드는 감정들을 묘사한다. 미즈코는 “배 속에 잠시 살았지만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일본엔 미즈코를 애도하는 의식이 있다.

활동가, 예술가, 연구자들이 폴란드 우익정당의 소수자 차별에 저항·투쟁한 역사를 기록하려 결성한 ‘A-P-P(거리 투쟁의 아카이브)’도 참여했다. 기존 폴란드 언론이 다루지 않은 낙태죄 반대·폐지 운동에 관한 내용을 강렬한 디자인으로 인쇄한 ‘파업 신문’ 등을 전시했다.

주최 측은 ‘국가·권력의 헤게모니에 좌우된 몸에 관한 이야기’라는 기획 의도로 ‘여성의 몸’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얘기를 다룬다. 전규리의 신작 ‘산증인’은 한국 문신의 역사 중 1950년대 전쟁포로의 몸에 새겨진 반공 문구나 태극기 등 ‘반공 문신’을 통해 개인에게 가해진 국가의 폭력을 환기한다.

성소수자도 주요 테마다. ‘낙태죄 반대를 위한 여성 파업’ 시위 때 처음 만들어진 A-P-P의 주제는 LGBTQ로 확장됐다. 일렉트라 케이비는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인종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한 항의 때 제작한 ‘I WAS NEVER YOURS’라고 적은 포스터와 함께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 돌봄과 상호 원조의 급진적 가족 구조, 사이보그와 여성 신을 중심으로’(2021)를 출품했다. 이성애 중심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파트너십을 담았다. 케이비는 동료이자 친구인 트랜스젠더 작가 레드 워시번이 경험한 성전환 과정을 사진과 글로 보여준다.

강라겸의 ‘난자 두 개로 태어난 새끼 쥐의 꿈을 꿔’(2021)는 “두 마리의 엄마 쥐로부터 단성 생식을 통해 새끼를 낳았다”는 ‘세포 줄기세포’ 과학저널 논문에 착안해 정자 없이 두 개의 난자로 태어나는 아이를 상상한다.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 규범을 수행하지 않으면 재생산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이다.

총괄기획자 김화용은 ‘성전환수술을 받은 고 변희수 전 하사를 육군이 강제 전역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이 전시 개막 1주일 전인 지난 7일 나온 점을 상기하며 말했다. “제도나 권력이 다양한 존재들의 몸을 규정하고 억압하며 편견을 만들어냈다. 트랜스젠더의 몸이나 성소수자들의 선택·재생산권을 다시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의 문제도 지적했다. “임신중지 수술을 시행하지 않는 병원이 여전히 많다. (임신중지 전후의) 의료 정보와 건강권 관련 입법이 절실하다”고 했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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