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이슈] "韓영화계 별이 지다"..'서편제' 만든 이태원 대표 오늘(24일) 별세

문지연 2021. 10. 2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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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등을 제작한 영화계의 거목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가 별세했다.

한국 영화계에 길이 남을 총 37편의 영화를 제작한 고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1993), 은관문화훈장(2003), 영평상 특별제작자상(1988),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1994),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공로상(2002), 백상예술대상 특별상(2003), 영화제작가협회 공로상(2014)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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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문지연 기자] 영화 '서편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등을 제작한 영화계의 거목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가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故) 이태원 전 대표는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해 5월 낙상사고를 당했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약 1년 7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빈소는 같은 병원의 3호실에 차려지며 유족으로는 부인 이한숙 씨와 자녀 철승, 효승, 지승, 선희 씨가 있다. 발인은 오는 26일 오전 7시로, 장지는 미정이다.

고인이 된 이태원 대표는 1938년 평양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떨어지며 어려움 속에 성장했다. 중학교 졸업 이후 부산에서 상경했고, 한때 조직에 몸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1959년 우연히 만난 무역업자의 권유로 인해 영화 제작에 몸을 담았다. 첫 영화인 '유정천리'가 탄생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후 1983년 의정부 소재의 빌딩을 인수했고, 빌딩에 있던 극장을 운영하게 되며 영화계와 연을 다시 맺었고, 경기, 강원 지역의 영화 배급을 담당했다.

1984년에는 부도 직전이던 태창영화사를 인수하며 '태흥영화사'를 설립했다. 20년 만에 영화 제작자로 돌아오게 된 고인은 임권택 감독과 '비구니'로 만났지만, 불교계의 반발로 인해 개봉이 무산됐다. 그러나 이때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인연을 맺은 뒤 임권택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할 정도로 동반자로 함께했다.

또 고인은 '무릎과 무릎 사이', '뽕',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1989년부터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을 제작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중 강수연 주연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제16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영광을 안았다.

또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는 각각 서울 관객 68만 명과 100만 명을 돌파하며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았다. 한국 영화 중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서편제'로는 상해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으로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알프레드바우어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에도 '취화선', '하류인생', 춘향뎐' 등 임권택 감독의 작품을 제작했던 고인은 '춘향뎐'으로는 칸 영화제에 처음 입성했다.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의 장편 경쟁부문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2년 후인 2002년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영화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해 한국 영화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는 임권택 감독이 만들고 조승우가 주연을 맡은 '하류인생'(2004). 이후 고인은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의정부 소재의 '태흥시네마'를 확대 운영했으며 태흥영화사가 보유한 저작권을 관리하며 노후를 보냈다.

한국 영화계에 길이 남을 총 37편의 영화를 제작한 고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1993), 은관문화훈장(2003), 영평상 특별제작자상(1988),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1994),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공로상(2002), 백상예술대상 특별상(2003), 영화제작가협회 공로상(2014) 등을 수상했다.

문지연 기자 lunamoo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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