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세번째 국면

이승준 2021. 10. 24. 18:1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존 머터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쓴 <재난 불평등> (2016)은 2000년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지진, 허리케인, 산불, 폭염 등을 분석해 재난을 3개 국면으로 나누고 '세번째 국면'에 대해 이같이 정의했다.

책은 재난이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재난의 사회적 복구 과정에서도 약자들이 소외된다고 지적한다.

2017년 포항 지진, 2019년 강원도 산불 등 재난 발생 전후 장애인들의 상황을 취재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프리즘]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엘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집회·시위 권리 보장 등 인권 중심의 일상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ㅣ이슈팀장

“사회악이 감추어지는 시기다. 언론은 이미 관심을 잃었고, 물리적·사회적 피해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물리적 피해는 손을 보면 되지만 사회적 피해는 간단히 다룰 수 없다. 사회적 복구라는 개념은 사실 현실화되기가 쉽지 않다. 벽돌이나 철근을 써서 설비를 더 튼튼하게 복구하는 건 확실히 가능하지만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를 더 나은 상태로 복구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존 머터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쓴 <재난 불평등>(2016)은 2000년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지진, 허리케인, 산불, 폭염 등을 분석해 재난을 3개 국면으로 나누고 ‘세번째 국면’에 대해 이같이 정의했다. 책은 재난이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재난의 사회적 복구 과정에서도 약자들이 소외된다고 지적한다. 2017년 포항 지진, 2019년 강원도 산불 등 재난 발생 전후 장애인들의 상황을 취재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두 재난에서 ‘재난취약계층’인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재난 안전 시스템은 사실상 없었다. ‘2017 포항 지진 백서’에서 이를 지적했지만 2019년 산불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중증장애인은 방치됐고, 청각·시각장애인은 대피 정보에서 소외됐다. 약자들은 재난 발생, 대피, 복구 등 모든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된다.

22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 앞에서 열린 ‘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인권네트워크)의 기자회견을 취재한 팀원의 기사를 손질하다 책장 한구석에 밀어놓고 잊고 있던 이 책이 다시 떠올랐다.

위드 코로나 논의와 함께 <재난 불평등>이 주목한 ‘세번째 국면’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인권단체 25곳이 모인 인권네트워크는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는 인권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묻고, 호소한다. “정부는 경제 활성화와 고용 성장을 위해서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수많은 질문들이 그저 경제 문제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 ‘누구와 함께,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략과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채, ‘일상으로의 회복’만 거듭 되풀이한다면, 또 다른 위기와 재난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인권네트워크의 기자회견에 참여한 홈리스 활동가, 장애인 등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슈팀 팀원들이 지난해, 올해 취재하고 썼던 기사가 하나씩 하나씩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난 2년 엄청난 재난 앞에서 시민으로서, 기자로서 변해가는 사회를 보며 느꼈던 고민들도 다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과도한 개인정보의 수집, 집회·시위의 자유 제한 등 방역을 위해 희생되고 유예되는 기본권을 보며 ‘코로나 시기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라는 무력감에 빠졌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목격할 때마다 가슴에 돌덩이 하나를 얹었다. 보호시설에 산다는 이유로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노인·장애인들, 무료급식 등이 줄어 끼니를 거르는 이들, 재택근무는 꿈도 꿀 수 없는 노동자들, 기약 없는 거리두기에 벼랑으로 몰린 자영업자 등 코로나19는 약자들에게 유독 가혹했다.

저자는 지난해 11월 책 개정판을 내어 미국의 코로나19 희생자가 백인보다 흑인과 히스패닉이 많다는 점을 예로 들며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거에도 그랬듯 재난 복구 과정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쫓겨나고,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이 더 많은 부를 쌓는 일이 다시 벌어질까 우려한다.

단계적 일상 회복은 지난 2년 동안 무수하게 쏟아진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가 조목조목 던지는 ‘팩트 폭행’에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재난을 겪은 후 세번째 국면에서 사회를 재건하는 데 실패하면 또 다른 재난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gamj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