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봐, 멋찐 언니들 싸움

한겨레21 2021. 10. 2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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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프로그램 <스우파> 의 뜨거운 인기.. '백댄서'로 불렸던 프로 댄서들의 매력에 빠지다
엠넷의 여성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홀리뱅이 경연 무대에 올라 춤추는 모습. 스트릿 우먼 파이터 인스타그램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

세간의 눈과 입이 ‘언니들’의 맞대결에 쏠렸다. 늘 무대 위에 있으면서도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여성 댄서들의 존재가 제대로 드러나자,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댄스 대결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리트 댄스 크루(집단)를 찾는 엠넷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 때문이다.

여성 댄서로만 구성된 크루들이 출연해 매번 주어진 임무에 따라 직접 짠 안무를 선보이고, 심사위원(파이트 저지)과 대중에게 평가받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7주 연속 콘텐츠 영향력 지수(CPI)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프라우드먼, 코카앤버터, 라치카, 훅, 와이지엑스(YGX), 홀리뱅, 웨이비 등 알려지지 않았던 크루의 이름이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유튜브로 진행된 ‘대중 평가’는 영상당 기본 200만 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가수 제시의 신곡 안무를 창작한 홀리뱅의 영상은 조회수 796만 회(2021년 10월19일 기준)를 넘겼다. 흥행하는 경연 프로그램은 많지만, <스우파>는 좀 특별하다.

‘캣파이트’는 없다, 리스펙이 있을 뿐

그간 여자들의 싸움은 대상화되거나 ‘캣파이트’(여성 간 육체적 싸움)로 비하됐다. 엠넷의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아름답고 톡톡 튀는 여성 연습생들의 모습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프로였기에, 자연스레 출연진의 외모가 늘 화제였다. 아이돌이 되려는 연습생의 숙명처럼, 표현의 주도권은 출연진이 아닌 제작진과 시청자에게 있었다. 래퍼들이 경연하는 <언프리티 랩스타> 시리즈는 이름부터 ‘언프리티’라는 외모 평가를 달고 시작한다. 여성의 갈등을 부추기는 연출도 많았다. 면전에서 ‘디스’(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랩을 하게 해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기본이고, 출연진이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을 극대화해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스우파>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댄서들이 인터뷰에서 서로를 칭할 때 극존칭을 쓴다는 점이다. 또래이건, 친하건, 잘 모르건 간에 항상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생경한 장면이다. 거친 디스가 농담처럼 오가는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요즘 예능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렇다. 불꽃 튀는 대결이 끝난 뒤에도, ‘잘했다’는 말을 진심으로 건네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린다. 탈락하고 나서도 “내가 떨어진 게 아쉬운 거지, 언니 팀이 올라가는 게 아쉬운 건 전혀 아니야”라며 덤덤한 응원을 전하는 장면도 카메라에 잡혔다. 오랫동안 묵묵히 각자의 길을 걸어온 프로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리스펙(존경)이 진하게 깔려 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정정당당하고 멋있게 싸운다. 지는 건 계산에 없다는 식으로 목숨 걸고 춤을 춘다. 자신의 능력을 과하게 의심하는 ‘가면증후군’도, 불필요한 겸손함도 없다. 어깨를 움츠리지도 않는다. 춤출 때는 물론이고, 서로의 무대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다들 척추를 곧게 펴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세교정 짤’로 돌아다닐 정도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잘했고 너 역시 최선을 다해 잘했다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이 매회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그간 서바이벌 프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아마추어리즘 없는 ‘진짜 프로’의 모습이 <스우파>에는 있다. 몸을 너무나 섬세하고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프로페셔널한 댄서들의 역량을 방구석 1열에서 직관하는 재미는 덤이다.

엠넷의 여성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댄스팀 프라우드먼이 경연 무대에 올라 춤추는 모습. 스트릿 우먼 파이터 인스타그램

대상화되지 않는 여성들, 자신만의 춤세계

<프로듀스 101> 시리즈를 제외하고서라도 그동안 방송에 나오는 여성들의 춤은 대부분 ‘섹시 댄스’ 범주로 묶이는 일이 많았다. 가슴, 엉덩이, 허벅지 등 여성 신체를 부각하는 춤이 많았고 자연스레 주도권 역시 표현하는 사람보다는 보는 이들에게 있었다.

<스우파>는 좀 다르다. <스우파>의 댄서들은 ‘남성 일반’을 포함한 시청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춤을 맞춰가며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동안 춰왔던 ‘자신만의 춤세계’를 제대로 펼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섹시한 춤을 추든, 터프한 춤을 추든 표현의 주도권은 외부가 아닌 댄서 자신에게 있다. 크루들의 이러한 면모는 혼성 미션에서 제대로 드러났다. 홀리뱅은 남녀를 구분해 ‘걸스 힙합’을 따로 떼어 분류하는 기존 힙합 신의 문화를 지적하며 성별이 잘 구분되지 않는 안무를 연출했다. 프라우드먼은 아예 멜로디 없이 가사로만 이뤄진 무대를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여성’을 표현했다. 댄서 본인에게 주도권이 있는 무대를 보며, 시청자가 역설적으로 그동안 봤던 경연 무대와 다른 ‘특별함’을 <스우파>에서 발견하게 된다. 심사위원도 이들을 ‘여성’으로 보고 평가하기보다는 한 명의 프로페셔널로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건 보아다. 10대 때 데뷔해 독보적인 춤세계를 쌓아온 보아의 존재는, <스우파>의 드라마를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감미료 구실을 한다.

경쟁을 통해 보이는 춤이 각양각색이라는 점도 <스우파>가 가진 매력이다. 와킹, 크럼핑, 힙합… 각 크루가 주력하는 장르를 미션마다 근사하게 선보이는 댄서들의 모습을 골라 보는 재미도 짭짤하다. 세계적 브레이크댄서인 YGX 크루 소속 ‘예리’의 브레이킹, 훅 크루와 함께한 여성 크럼핑팀의 격렬한 동작을 보고 있자면 춤의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는 걸 가슴 깊이 느끼게 된다.

이름으로 기억되는 ‘댄서’들

<스우파> 등장 이후, 시청자는 댄서들을 이름으로 기억하게 됐다. ‘엑소(EXO) 카이 백댄서’ ‘박재범 백댄서’가 아니라 ‘노제’고 ‘허니제이’다. 연예인 이름과 언제나 함께 언급됐던 댄서들이 자기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 때문일까. 댄서들의 직캠(직접 찍은 영상)도 인기다. 현아·던과 함께 무대에 섰던 댄서 엠마의 직캠은 조회수 443만 회를 넘겼고, 샤이니 키의 무대에 함께 선 댄서 노제의 직캠은 조회수 180만 회를 기록했다. 늘 보조 역할을 하느라 그늘에 가려 있던 댄서들의 실력과 매력이 방송을 통해 터져나온 덕이다. <스우파>는 10월26일 마지막 방송을 남겨두고 있다. <스우파>는 끝나도, 여성 댄서들이 펼쳐나갈 무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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