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물결 춤추는 억새바다 아끈다랑쉬오름 가보셨나요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1. 10. 2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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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억새따라 깊어가는 제주의 가을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 옆 아끈다랑쉬오름
분화구 전체가 은빛억새의 바다
정상 오르면 성산일출봉·우도 파노라마
나 혼자 즐기는 궁대오름·제주자연생태공원 억새밭
아끈다랑쉬오름 정상 갈대
길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싼 것은 온통 어른 키만 한 억새들. 햇살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는 성산일출봉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물결처럼 출렁이고 나도 은빛으로 물들며 억새 따라 이리저리 흐느적거린다. 아끈다랑쉬오름에 올라 억새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다.
아끈다랑쉬오름
◆오름 전체가 억새, 아끈다랑쉬오름 가보셨나요
오름은 ‘자그마한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한라산이 엄마 화산이라면 오름은 한라산 주변에 흩뿌려진 기생화산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봉우리 봉긋하게 솟아 있다. 이런 오름이 360개가 넘으니 제주의 가을은 오름의 억새를 타고 온다. 9월부터 보랏빛 보푸라기를 조금씩 드러내더니 이제 숱 많은 노신사의 은발처럼 오름마다 반짝이는 억새가 장관이다. 따라비오름과 새별오름, 산굼부리가 유명하지만 억새만큼 많은 여행자들이 찾다 보니 고즈넉한 가을 풍경을 즐기기는 이제 틀렸다. 사람 없는 억새밭 나 홀로 즐기고 싶다면 제주시 구좌읍 아끈다랑쉬오름으로 가면 된다.제주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과 마주보고 있는 동생 오름인데 많이 작다. 그래서 작다는 제주방언 ‘아끈’이 앞에 붙었다. 다랑쉬오름은 여왕답게 규모가 상당하다. 해발 382m, 비고 220m, 밑지름 1013m, 전체 둘레 3391m에 달하고 오름 정상에 깔때기 모양의 원형 분화구가 움푹 팼는데 화구 둘레는 1500m에 달한다. 특히 화구의 깊이는 한라산 백록담과 비슷한 115m라니 그 크기가 짐작된다.
아끈다랑쉬오름 가는 길
아끈다랑쉬오름 가는 길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설문대 할망이 치마로 흙을 나르면서 한 줌씩 떨어뜨려 놓은 것이 지금의 제주의 오름이다. 그런데 다랑쉬오름은 흙이 너무 높게 쌓이는 바람에 높이를 낮추려고 손으로 ‘탁’ 쳤는데 꼭대기가 푹 패면서 지금의 거대한 분화구가 됐다고 한다. 산봉우리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여 다랑쉬(도랑쉬, 달랑쉬), 월랑봉이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있고 ‘높은 봉우리를 가진 오름’을 뜻하는 우리 옛말 ‘달수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어디서나 잘 보이는 균형 잡힌 오름 모습 때문에 오름의 여왕으로 불린다. 하지만 입구부터 가파른 계단이 시작돼 정상까지 오르기 쉽지 않다. 주차장이 같아 둘 다 오를 수 있지만 다랑쉬오름 정상까지 다녀온다면 아마 아끈다랑쉬오름에 오를 기력은 사라진 상황일 터. 가을에 둘 중 한 곳만 선택한다면 아끈다랑쉬오름이 강추다. 겉에서 보기에는 아주 작은 뒷동산이다. 실제 오름 높이는 해발 198m이지만 비고는 58m에 불과하다. 방문자센터 관계자에 물어보니 오르는 데 10분이란다. 한걸음에 다녀올 수 있겠다. 주차장에서 정자 앞으로 난 샛길로 들어서면 된다. 별로 볼 것 없을 것 같은 오름이지만 모퉁이를 돌자 양옆에 억새가 줄을 지어 여행자를 맞으며 가을냄새를 제법 풍긴다.
아끈다랑쉬오름 정상
그런데 생각보다 오르기 쉽지 않다. 이곳은 사유지로 제대로 된 탐방로가 아예 없다. 앞선 여행자들이 오름에 오르면서 겨우 만들어진 흔적을 따라 한발 한발 올라가는데 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더구나 풀들이 다리와 팔뚝을 마구 스친다. 반바지와 반팔은 절대 금물이고 신발도 반드시 트래킹화를 신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반팔차림으로 나섰다 아차 하며 차로 돌아와 다시 점퍼를 입고 오름에 오르자 세상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진다. 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억새가 분화구를 따라 돌아가며 거대한 바다를 이뤘다. 그냥 오름 정상 전체가 억새밭인데 태어나 이런 풍경을 여태 보지 못했다. 저 멀리 바다에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아스라이 떠 있는 환상적인 풍경은 덤이다.
아끈다랑쉬오름 정상에서 본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갈대
억새밭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바람에 출렁이는 억새는 낮은 속삭임으로 노래하며 귓불을 간지럽히고 온 몸은 가을 낭만에 흠뻑 빠져든다. 뒤를 돌아보니 다랑쉬오름이 높이 보이고 그 앞의 억새들은 햇빛에 반짝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오름 정상도 길이 따로 없다. 대충 분화구 둘레를 따라 걸으면 되는데, 억새가 워낙 빽빽해 혼자서는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름 정상 초입에서 만나는 커다란 ‘나홀로 나무’를 목표삼아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입구로 돌아간다.
메밀밭
궁대악 분화구전망대
◆억새와 하얀 풍력발전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궁대오름
서귀포시 성산읍 궁대오름을 끼고 펼쳐진 제주자연생태공원은 제주 여행자들이 거의 모르는 곳이다. 덕분에 찾는 이 거의 없어 나만의 가을 억새를 즐길 수 있다. 아끈다랑쉬오름과 차로 20분 거리여서 함께 둘러보기도 좋다. 입구로 들어서자 야생동물관찰장의 노루 한 마리가 예쁜 눈을 껌벅이며 반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뿔이 없다. 서열 싸움과 텃세로 일어나는 사고와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뿔을 잘랐다는 설명이 적혔다. 뿔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없어서 뿔을 잘라도 노루들은 아파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곳은 다친 동물을 치료해 다시 생태계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동물병원. 먹이사냥하다 날개가 부러진 황조롱이, 말똥가리, 매, 독수리, 수리부엉이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궁대오름 일대 야생동식물을 조사·연구하고 야생동물 해설과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궁대악 분화구 전망대 갈대밭
궁대악 갈대숲
궁대악 산책로
이곳에서 궁대오름 분화구 전망대까지는 왕복 30분이면 충분하다. 산책길을 따라 나서자 먼저 드넓은 메밀밭이 펼쳐진다. 가을에 내린 하얀 눈 같다. 그 너머로 하얀 풍력발전기 날개가 푸른 하늘에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돌아가는 풍경이 목가적이다. 분화구 전망대 가는 길이 뷰포인트. 어른 키를 훌쩍 넘는 갈대들이 양옆으로 펼쳐져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전망대에 오르자 갈대숲 너머 왼쪽부터 손지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뒤를 돌아서면 좌보미알오름, 좌보미오름, 백약이오름, 월랑지오름이 늘어섰고 좌보미오름 뒤로 한라산이 웅장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분화구로 내려가는 길이 전망대 뒤쪽에 숨어 있다. 내리막길을 조금 따라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역시 억새바다가 펼쳐진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갈대를 나 혼자 다 가진 듯 낭만적인 풍경에 흐뭇한 미소가 나온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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