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갖추며 문턱은 낮춰.. '소통하는 미술관' 거듭난다 [심층기획]

김예진 2021. 10. 2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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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7개월 만에 문 여는 삼성 리움
홍라희 관장서 '이서현 체제'로 시즌 2
디자인·공간·서비스적 요소도 리뉴얼
기존 로고 떼어내고 역동적 로고 바꿔
462인치 '대형 미디어월' 관람객 압도
안내데스크부터 유명 '이배 작가' 작품
천장에는 김수자 설치작품 '호흡' 반겨
고미술·현대미술 상설전 새롭게 개편
수장고 잠들었던 새작품 50∼60% 달해
전시 공간안 관람자 경험 더 특별해져
리움 기획전 전시 전경. 리움 제공
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인 삼성의 ‘리움’이 지난 8일 재개관했다. 표면적으로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휴관했다가 1년 7개월 만에 문을 여는 것이지만 실제 의미는 더 크다. 해외 유명 작가들이 한국에 오면 리움을 꼭 방문하고 싶어한다고 해 ‘리움 로망’이 있다고 할 정도로, 리움은 한국 미술계의 대표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재개관은 2004년 설립 이후 내달려온 리움이 17년 만에 내부 전시장의 하드웨어는 물론 프로그램과 정체성 등을 재정비하고 ‘시즌2’로의 새출발을 알리는 재개관이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이라는 대형 ‘사건’ 이후의 리움, 또 ‘홍라희 관장 체제’에서 삼성가(家)2세 운영위원장인 ‘이서현 체제’로의 변화한 리움이 어떻게 첫 모습을 드러낼지 미술계 관심도 집중됐다. 리움에 새로 합류한 김성원 부관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재개관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모습과 전시들이 “변화의 신호탄”이라고 말했다. 재개관일에 리움을 찾았다.

◆확 바뀐 리움 새 키워드 ‘소통’

리움은 입구에 내걸려 마치 간판처럼 관람객을 제일 먼저 맞이했던 MI(Museum Identity)를 리뉴얼했다. 삼성가 성을 딴 ‘LEEUM’이라는 기존 로고를 떼어냈다. 세련미와 위엄이 느껴지던 로고 대신, 둥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휘몰아치듯 활기차고 역동적인 원형 디자인의 로고를 내걸었다. 사람들을 고요하게 빨아들이는 태풍의 눈이 연상된다.

리움 측은 “시계의 회전, 지구의 공전 궤도에 착안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관문을 표현한 것”이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도약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영국 테이트미술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적 미술관 MI를 디자인한 울프 올린스사(社)가 디자인했다.
MI가 교체된 리움 입구. 리움 제공
로비로 들어서면 한쪽에 작게 치우쳐 있던 안내데스크가 눈에 띄게 확 커져 넉넉하게 관람객을 맞는다. 가로길이가 약 14m에 달한다. 로비 한쪽 벽면에는 가로 11.3m, 세로 3.2m인 462인치 대형 미디어월이 펼쳐져 있어, 미디어월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가 나오고, 화면 속 변화하는 영상이 로비를 다양한 빛으로 비춘다.

반전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로비부터 작품이라는 사실. 입장권을 끊고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공간이지만 명작들이 숨어있다. 투명한 안내데스크 안에 설치된 것은 ‘숯의 작가’로 유명한 이배의 작품 ‘불로부터’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표식 밖에 서서 이배의 작품을 관람했던 관람객이라면 240여개 숯이 동원된 이배의 작품 바로 옆에 서서 입장을 안내받고 그 위에 가방이나 휴대전화를 올려놓고 입장 채비를 하는 일상경험까지 특별한 첫인상으로 남을 수 있다. 천장에는 김수자의 설치작품 ‘호흡’의 특수 필름 덕에, 날씨에 따라 변하는 빛이 로비에 투과된다.

벽면의 미디어월 화면은 수많은 작은 사각형으로 쪼개져 국내외 유명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인터뷰 영상이 점멸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연 풍경으로 전환된다. 바람이 부는 자작나무 숲에서 나뭇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다가, 맑은 물 속에서 공기방울이 떠오르더니, 꽃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으로 변한다. 미국의 영상설치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작품 ‘보이지 않는 눈 6’, ‘태고의, 2’, ‘화환’으로 전환된 것이다. 현존하는 디스플레이 중 가장 우수한 화질인 5000만 화소 이상의 해상도를 지원해 관람객에게 풍부한 몰입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게 리움 측 설명이다.
리움 로비 미디어월. 리움 제공
현대미술 작품을 로비부터 설치했던 것은 이전의 리움도 마찬가지였지만, 새로운 작품, 새로운 설치방식이 주는 신선함이 있다. 로비 곳곳에 새로 놓인 스툴에 앉아 부담없이 로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휴식하는 사람들과 그들 곁의 작품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로비 풍경은 분명 편안한 인상을 더한다.

이외에도 기획전 관람 때 관람객이 쓰는 오디오가이드의 어린이용 버전을 따로 만들어 제공하는가 하면, 뮤지엄숍에서 단순한 전시기념품들을 판매하는 대신 오리지널리티(원본성)를 가진 예술작품이면서도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공예품들을 다수 선보이는 등 변화가 눈에 띈다. 접근성을 높이는 배려나 소통을 키워드로 신경을 쓴 흔적들이다.

리움 측은 재개관일에 가진 간담회에서 리움이 쌓아온 높은 명성 한편에 ‘그들만의 리그’, 또는 ‘폐쇄적 이미지’라는 시선이 있었다는 질문에 반박하지 않았다. 시즌2의 콘셉트를 설계한 핵심인사로 꼽히는 정구호 크리에이티브디렉터는 “바로 그 점이 재개관의 중요 포인트였다”며 “문턱을 낮추고 대중에게 좀더 오픈하고 소통하는 것을 중요시했다”고 말했다. 문화를 선도하면서도 대중과 소통한다는 캐치프레이즈다. 그는 “건축가의 설계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디자인적 요소로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올 수 있는 뮤지엄이 될 수 있게 포커스를 맞췄다”며 “홈페이지, 뮤지엄숍 등까지 이용자 편리성을 높이고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정 디렉터는 ‘이서현호 리움’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리움이라는 뮤지엄 자체가 갖고 있는 디자인·공간·서비스적 요소를 리뉴얼하는 과정에서 대중과 더 잘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며 “홈페이지 등도 그런 방향으로 매년 진화시킬 것이고, 소셜미디어 등도 더 적극적으로 가져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서현 리움운영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재개관을 맞아 리움을 찾은 하종현, 이건용 화백을 직접 맞이하고 있다. 하종현 화백 인스타그램
◆명불허전인 전시들

재개관한 리움을 방문하면 관람할 수 있는 전시는 세 가지다. 고미술 상설전, 현대미술 상설전은 새로 개편됐고 기획전은 ‘인간, 일곱개의 질문’이라는 주제다.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명불허전’. 수장고에 수십년 잠자던 작품들을 다시 꺼내 새로 나온 작품들이 50∼60%이다. 이런 작품들이 있었나 싶은 작품들이 많아 ‘리움 파워’를 보여준다.

리움 관계자는 “그간 소장품 상설전에서는 항상 미술사를 베이스로 꾸미다 보니 중요작가 중심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휴관기간 소장품 연구를 다시 진행하면서, 미술사의 대표작가를 선보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작품과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는 상설전에서 연대기별 대표작품이나, 부문별 대표작품을 선보이는 방식이 아닌, 주제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가령 고미술 상설전 중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코너는 ‘고려청자전’이 아닌, ‘푸른 빛 문양 한 점’이 주제다. 고려시대 유물 특유의 아름다운 비색 미감을 키워드로 국보와 보물부터, 그런 레테르 없이도 아름다운 소품들, 고려 비색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 작품들까지 어우러진다. 전시 중인 대상의 위대함이나 권위보다 전시 공간 안에서 느끼는 관람자의 경험이 더욱 새롭고 특별해진다.

현대미술 상설전의 ‘검은 공백’ 코너 역시 현대미술에서 검정색이 가졌던 의미를 두루 짚어내면서 모든 작품이 전면에 과시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작품들을 고심 끝에 배치한 흔적이 엿보인다. 모든 빛이 흡수된 색 검정 회화 작품들이 전면에서 관람객을 흡수하듯 끌어당기는가 하면, 김홍석의 조각 ‘비닐봉지’는 어디선가 날려와 그곳에 머무르게 된 듯 전시장 구석 벽 뒤로 숨어있다. 관람은 보물찾기하듯 걸으면서 사유하는 체험이 된다.
리움 기획전 전시 전경. 리움 제공
인간은 왜 이리 취약하고, 그러면서도 왜 도전하며, 어떤 미래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기획전은 들어서는 길목부터 서늘한 압도감을 준다. 전후 피폐한 인간의 조건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실존주의 조각자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조각 ‘거대한 여인Ⅲ’의 앙상한 인간상을 필두로, 안토니 곰리 ‘표현’, 조지 시걸 ‘러시 아워’가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내리막길에 거꾸로 뒤돌아 서 있다. 마치 조각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관람자와 같은 방향으로 전시장을 향해 걷는 듯하다. 이 조각들을 양쪽으로 스치듯 가까이 지나가며 전시의 본론에 당도하는 관람객은 이미 인간을 주제로 한 물음에 젖어든다. 이내 혼종이 되어 삐걱거리고 있는 인간상 로버트 룽고 ‘이 좀비들아:신 앞의 진실’ 앞에 도착한다.

리움 관계자는 “로버트 룽고의 작품은 근 30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작품이고, 수십년 만에 꺼내는 작품들이 곳곳에 있다”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인류가 팬데믹을 비롯한 여러 위기에 봉착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기술적으로 급변하며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시점이야말로 인간이라는 근원적 주제를 물어야 할 때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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